2016년 창업한 카풀 스타트업(초기 창업 기업) 풀러스는 이용자가 스마트폰 앱(응용 프로그램)으로 차량을 부르면 주변에 있는 카풀 차량을 연결해주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네이버, 미래에셋, SK그룹이 220억원을 투자하고 불과 1년 만에 75만명의 회원을 확보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지난해 서울시가 풀러스 서비스에 대해 출퇴근 시간에만 카풀이 가능하도록 한 현행법을 위반했다며 경찰 조사를 의뢰하자 운전자와 이용자가 급감했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정부는 택시 업계의 반발에 부딪혀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시간만 보냈다.

경영난에 빠진 풀러스는 결국 지난 18일 창업자인 김태호 대표가 물러나고 직원 70%를 해고했다. 한때 '한국판 우버'로 불리며 촉망받던 스타트업이 규제에 부딪혀 주저앉은 것이다. 풀러스 관계자는 "규제를 곧 풀어주겠다는 정부 약속만 믿고 사업을 확장하다가 지난해에만 1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냈다"면서 "이런 식이라면 한국에서 혁신적인 서비스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혁신 성장 가로막는 규제 장벽

현 정부는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대대적인 규제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인공지능(AI)·빅데이터·드론(무인기)·자율주행차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기술과 서비스를 한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목표였다.

군사지역에 만든 이천 드론경기장… 1년간 딱 한 번 사용 - 지난 4일 오후 경기도 이천시의 드론 경기장엔 잡초만 무성히 자라 있었다. 사진 속 휴대폰에 주황색으로 표시된 구역이 군(軍) 관제구역이고, 이 경기장은 관제권 안에 있어 사전 비행 승인을 받아야만 드론을 띄울 수 있다. 이천시는 경기장 조성 과정에서 군 당국과 ‘안전사항 준수’를 조건으로 협의를 마쳤다. 하지만 개장 이후 1년 2개월간 시설 이용이 1건에 그쳤다. 다른 지역에선 사전 승인 없이 드론을 띄울 수 있지만, 이곳에선 비행 승인에만 3~5일이 걸린다.

하지만 기업들은 규제 개혁 성과가 별로 안 보인다고 지적한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 15일 김동연 경제부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대한상의 회장이 된 지 4년간 38번, 40번에 가깝게 (규제 개혁) 과제를 말씀드렸는데, 상당수가 그대로 남아 있어 기업들은 현장에서 변화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실제로 핀테크(금융 기술) 기업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금산분리(金産分離·금융과 산업 자본의 분리) 규제에 묶여 있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차량 공유 서비스도 한국에선 발붙일 곳이 없다. AI 의료 시스템과 원격 의료도 규제에 가로막혀 걸음마조차 떼지 못하고 있다. 우수한 의료 시스템을 개발한 국내 업체들은 서비스가 불가능한 국내시장 대신 해외에서 활로를 찾는 처지이다. 김영수 연세대 약대 교수는 "중국 인터넷 기업 알리바바나 텐센트가 우리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금융 서비스와 원격 진료를 제공하면 그때는 어떻게 규제를 할 것인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산업을 육성하겠다며 새로운 규제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은 지난 3월 드론 설계와 부품, 비행 제어 시스템 등을 명시한 한국산업규격(KS)을 제정했다. 정부는 "국제 표준이 없는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규격을 만들어 시장을 선도하려는 정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드론 업계는 업계 의견 수렴 절차도 거치지 않은 탁상행정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한 드론업체 관계자는 "멀쩡히 잘 날고 있는 드론도 인증을 받으려면 설계를 바꿔야 할뿐더러, 농업·측량 등 분야마다 사용되는 드론의 설계가 각각 다른데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느냐"고 말했다.

◇생색내기용 육성책만 내놓는 정부

미래 산업이 규제에 묶여 있는 사이 스마트폰과 LCD(액정표시장치)·TV 등 한국의 주력 IT(정보기술) 산업은 가격은 물론 기술 경쟁력도 급격히 쇠락하고 있다. 시장조사 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화웨이·오포·비보·샤오미 등 중국 업체들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42%로 한국의 삼성전자·LG전자(24.8%)의 두 배에 육박한다. LCD 역시 인건비를 제외한 원가 경쟁력에서도 BOE 등 중국 기업이 한국을 앞서고 있다.

하지만 정부 각 부처는 규제 개혁보다는 생색내기용 육성책 발표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예컨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6일 10조원 규모의 국내 데이터 시장을 만들고 전문 인력 15만명을 키우겠다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하지만 빅데이터 사업 성공의 관건인 개인정보 관련 규제에 대한 해결 방안은 내놓지 못했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주창하는 소득 주도 성장이 실현되려면 기업인들이 눈치 안 보고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하는데 현 정부는 기업을 적폐와 규제 대상으로만 보는 것 같다"면서 "이런 시각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규제 개혁을 외쳐봐야 구호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