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4일 “최근 미국 금리 상승과 달러화 강세가 일부 신흥국 금융 불안의 원인이 됐는데, 앞으로 선진국이 통화 정책 정상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급격한 자본이동과 국제 금융시장 불안은 언제든지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날 이틀간 일정으로 서울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통화정책의 역할,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열린 ‘2018 한국은행 국제 콘퍼런스’ 개회사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오는 14일(현시시간) 개최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총재는 또 “중립금리가 위기 이전보다 상당폭 낮아진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며 “통화정책의 한계를 고려해 재정 정책, 거시건전성 정책 등 다른 정책과 조합을 적극적으로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립금리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고 잠재성장률만큼 경제 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금리 수준으로, 중립금리가 낮아지면 경기 하강국면에서 기준금리를 인하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 중앙은행이 경기 변동에 충분히 대응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이와 함께 이 총재는 수요 부진 상황에서는 재정 지출의 구축(crowding-out) 효과가 크지 않아 확장적인 재정 정책이 필요하고, 저성장, 저인플레이션 환경에서 통화 정책이 경기 회복을 추구하면 금융 불균형이 누적될 수 있어 거시건전성 정책의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4일 열린 ‘2018 한국은행 국제 콘퍼런스’에서 기조연설하고 있다.

콘퍼런스에 참석한 마사키 시라카와 전 일본은행 총재도 “통화정책은 환경 변화에 유의하면서 경제이론과 현실, 제도와 금융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점검하면서 운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새로운 제품들이 개발되면서 인플레이션 측정이 어려워졌고, 장기간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이어지면서 부채가 누증돼 물가와 금융 안정 간 상충관계는 커졌다고 진단했다. 대외요인이 개별 국가의 통화정책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도 확대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주요국 중앙은행은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로(0) 금리에 이은 마이너스(-) 금리, 대규모 자산매입(양적 완화), 포워드 가이던스 등 각종 비전통적인 정책 수단을 도입했다. 중앙은행 발권력을 동원해 천문학적인 유동성을 퍼부은 데 힘입어 세계 경제는 위기의 터널을 빠져나왔지만 중앙은행들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한번도 써보지 않은 비전통적인 정책 수단을 활용하는 사이 통화정책 환경이 크게 바뀐 것이다. 임금상승률과 물가상승률 간 상관관계가 약화됐고 정책금리가 낮은 수준에 머무르며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활용해 경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도 줄었다.

각국 중앙은행은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통화정책을 운용하고 그 효과를 높여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한국은행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세계적인 석학들을 초빙해 4일과 5일 이틀간의 일정으로 ‘통화정책의 역할,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2018 한국은행 국제 콘퍼런스’를 열었다.

콘퍼런스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장기간 이어진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부채 누증이라는 부작용을 가져왔고, 주요국의 통화정책 변화가 다른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커졌다고 진단하며 중앙은행이 효과적인 정책 수단을 점검하는 한편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거시건전성정책과의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 명목금리 1%포인트 오르면 물가 상승률 1%포인트 높아져

전문가들은 통화정책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물가 안정이라는 중앙은행의 핵심 정책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정책금리 조정이라는 전통적인 수단이 효과적이라고 평가했다. 마틴 유리베 콜럼비아대 교수는 미국과 일본 사례를 분석한 결과, 명목금리가 장기적으로 1%포인트 인상되면 1년 이내 물가상승률은 1%포인트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는 “금리 하한에서도 명목금리를 점진적으로 인상하는 정책이 경기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 목표 물가를 달성하는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장 파블로 니콜리니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역시 “통화량이 많아질수록 물가가 오른다는 고전이론 ‘화폐수량설’이 여전히 물가상승률과 명목금리, 통화량 증가율과 물가상승률 간 관계를 설명하는 데 유효하다”고 했다.

중앙은행이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하면 통화정책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구체적인 기준금리 예상 경로를 명확히 밝히는 ‘포워드 가이던스’를 도입하지 않아도 중앙은행이 시장에 정확한 경제 전망을 밝히면 장기 금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맥마흔 옥스퍼드대 교수는 “중앙은행이 경제 상황에 대한 전망과 전망의 리스크, 불확실성에 관해 의사소통하는 것은 경제 주체의 기대를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말했다.

리카도 라이스 런던정경대 교수는 중앙은행 간 체결하는 통화 스와프 계약의 효과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미 연방준비제도(FRB)와 통화 스와프 계약을 체결한 국가에서 달러화 유동성 여건이 개선되고 외환시장이 안정되는 효과가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 통화정책과 재정정책, 거시건전성 정책 공조 필요

전문가들은 통화정책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재정과 거시건전성 정책 등 다른 정책과 공조가 필요하다는 것에도 공감했다. 엘렌 맥그라탄 미네소타대 교수는 경제 성장과 기업 활동, 가계 소득에 유효세율 변화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제 성장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재정 정책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다만 금리가 낮은 상황에서 재정 정책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마르코 바세토 시카고 연방준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국채 금리가 경제성장률보다 낮은 저금리 상황에서는 확장적인 재정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이날 콘퍼런스에서는 중앙은행이 분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 통상 긴축적인 통화정책은 소비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리가 인상되면 자산가의 소득과 소비는 늘어나지만 총수요와 노동소득이 감소하면서 하위 소득계층의 소비는 위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분배를 개선하는 데에는 통화정책보다 재정정책이 효과적이라는 입장이다. 그레고 카플랜 시카고대 교수는 “가계의 소득 다양성이 고려되는 경우 금리 정책보다 소득 변화에 대한 소비의 반응이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소비활성화를 위해서는 통화정책보다 재정정책이 효과적”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