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5년이면 TV와 자동차부터 전등, 가전제품 등 우리가 쓰는 모든 사물이 인터넷과 연결되는 '컴퓨터 1조(兆)개 시대'가 열릴 겁니다."

세계 최대의 모바일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의 사이먼 시거스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8일 본지 인터뷰에서 "1조개의 기기에는 인공지능(AI)이 탑재되고 빅데이터와 클라우드(가상 저장공간) 기술이 적용될 것"이라며 "데이터의 양이 폭증하는 만큼 반도체의 성능도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돼야 한다"고 말했다. 시거스 CEO는 일본 ARM 이사회 참석 등 아시아 순방길에 방한했다. ARM은 2016년 7월 일본 소프트뱅크에 234억파운드(당시 약 36조원)에 인수됐다. 당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바둑으로 치면 50수 앞을 미리 내다보고 인생 최대의 베팅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ARM은 모바일 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의 설계도를 그리는 회사다. 삼성전자·애플·퀄컴 등 반도체·스마트폰 기업들은 ARM의 기본 설계도를 구매해 이를 토대로 각자 맞춤형 반도체를 개발한다. 퀄컴의 스냅드래건, 삼성전자의 엑시노스, 애플의 A 시리즈 칩이 모두 ARM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다. 현재 세계 스마트폰용 반도체의 90% 이상이 ARM의 기술을 쓰고 있고, ARM의 설계도를 쓴 반도체는 작년 한 해에만 213억개가 생산됐다.

모든 사물의 컴퓨터化

시거스 CEO는 "회의실의 전화기는 회의 내용을 알아서 듣고 음성을 구별해 실시간으로 회의록을 작성하고, 자율주행 자동차는 날씨나 요일에 따라 맞춤형 경로를 스스로 정해 운행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미래에 대해 생활 곳곳에서 인공지능 분석(A)과 빅데이터(B), 클라우드(C), 데이터(D), 에지 컴퓨팅(E·모든 기기가 컴퓨터화된다는 의미)이 활성화되는 'ABCDE' 사회라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 모바일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을 이끄는 사이먼 시거스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18일 경기도 분당 ARM코리아 사무실에서 IT(정보기술)의 미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거스 CEO는 “많은 사람이 좀 더 빠르고 저렴하게 기술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ARM의 비전”이라고 말했다. ARM은 2016년 소프트뱅크에 인수된 뒤 회사 로고를 소문자 디자인으로 바꿨다.

그는 이런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반도체 설계의 개념도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시거스 CEO는 "현재 AI나 자율주행차에는 GPU(그래픽 반도체)를 많이 사용하지만 크기가 크고 전력을 많이 쓰는 한계가 있다"면서 "ARM은 내부적으로 '프로젝트 트릴리엄(1조)'을 결성해 저(低)전력 기반으로 다양한 업무를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차세대 AI 반도체 개발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소프트뱅크에 인수된 이후 가장 큰 변화에 대해 시거스 CEO는 "신기술 개발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매년 영업이익률이 50% 이상을 기록하던 ARM은 작년 영업이익률이 24%까지 줄었다. 대신 연구·개발(R&D) 투자가 10억4300만파운드(약 1조5200억원)로 이전의 두 배로 늘었다. AI와 자율주행차 등 신기술 개발을 위해 지난 2년간 1800여 명을 신규 채용하면서 직원 수도 40%나 늘었다. 소프트뱅크 이사회 일원이기도 한 시거스 CEO는 "소프트뱅크라는 지원군을 맞이한 뒤 투자를 늘리다 보니 이익률이 떨어진 것"이라며 "매년 5회 이상 손 회장과 만나 미래 기술과 소프트뱅크, ARM의 장기 전략에 대해 논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손 회장의 막대한 미래 기술 투자는 시장 선도뿐만 아니라 ARM의 기술력 확보에도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반도체 경쟁력 튼튼…글로벌 합종연횡 더욱 치열

시거스 CEO는 반도체 수퍼사이클(초호황)에 대해 AI와 사물인터넷 같은 새로운 수요가 계속 생기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상황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대해서는 "이미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데다 AI 반도체, 파운드리(위탁 제조) 같은 차세대 분야에도 투자를 늘리고 있기 때문에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AI 시대에는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기술 생태계 구축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시거스 CEO는 중국이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 넘기겠다는 ‘반도체 굴기’ 선언에 대해 시장의 규모를 늘릴 수 있는 호재(好材)라고 평가했다. 그는 “중국 반도체 시장 규모는 매우 급속히 커졌고 (중국 기업의) 기술 개발 능력도 지난 몇 년간 급격히 성장했지만 기존 기업들도 필사적으로 기술 혁신을 위해 투자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따라잡히지 않을 것”이라며 “오히려 중국 시장이 커지면서 반도체 기업 간 글로벌 기술 협력이 늘어 산업 전체에 긍정적인 자극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사이먼 시거스 ARM CEO는

영국 서식스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맨체스터 대학에서 컴퓨터공학 석사를 받았다. 영국에서는 ‘영국 IT의 자존심’으로 불린다. 1991년 ARM의 16번째 직원으로 입사해 2013년 CEO에 취임했다. 그에게 성공 비결을 묻자 “개방성을 내세워 전 세계를 겨냥한 사업전략을 세운 게 주효했다”며 “한국에도 고객사를 만나러 자주 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