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세계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 중 하나였던 인텔은 고심 끝에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의 철수를 선언했다. 1984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일본의 신흥 반도체 기업들이 D램 시장에 뛰어들면서 치킨게임(Chicken Game·죽기살기식 경쟁)이 발발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인텔로서도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당시 인텔의 임직원 중 상당수가 메모리 사업부에 몰려 있었고 핵심 경영진이나 엔지니어들도 상당수가 메모리 사업부 출신이었다. 세계 시장에 첫 상용 D램을 선보였던 인텔의 D램 시장점유율은 한때 세계 시장 100%에 육박할 정도로 회사를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했다.

메모리 시장 철수를 선언한 해 인텔은 상장 후 첫 적자를 기록했다. 인텔은 1년 동안 7개의 팹(Fab)을 폐쇄했고 7200여명에 달하는 임직원을 해고했다. 당시 딕 바우처 인텔 부회장은 "무능력한 직원이 아니라 가장 우수한 능력을 가진 엔지니어들을 해고한 것"이라며 "끔찍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오늘날의 인텔을 있게 만든 결단이기도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패권은 미국, 일본을 거쳐 한국에 넘어왔다. 이제 도전자는 중국이다. 1980년대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국은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바탕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기술 복제에 혈안이 돼 있다. 1970년대부터 인텔의 메모리 기술을 카피하기 위해 온갖 첩보전을 벌였던 일본 기업처럼 말이다.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 진입은 이미 기정사실화됐다. D램보다는 진입 장벽이 낮은 낸드플래시의 경우 창장(長江)메모리(YMTC)가 이르면 올해 10월부터 3D 낸드플래시 양산을 시작할 전망이다. 한국 메모리 기업들의 '밥줄'이나 다름없는 D램도 늦어도 2020년쯤이면 안정적인 수율을 확보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기업들은 앞으로 다가올 파도에 얼마나 준비가 돼 있을까?

우선 두 기업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서는 모두 미래 사업으로 시스템 반도체 사업에 오랜 기간 투자해왔지만 성적표는 그리 좋지 않다.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분야의 경우 제대로 된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의 거함인 대만 TSMC의 시장 지배력은 ‘콘크리트’처럼 견고하다. 최근에는 중국계 파운드리 기업마저 뛰어들어 환경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중앙처리장치(CPU) 분야의 경우 삼성전자가 모바일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사업을 하고 있지만 수년째 같은 회사인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외에 이렇다할 대형 고객사를 잡지 못했다. 수익성도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와 함께 각광받고 있는 자동차용 반도체 분야 역시 프리스케일, NXP 등 주요 회사들을 인수할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시장 침탈이 시작된 지 2년 만에 인텔이 메모리 반도체를 과감하게 버리고 회사의 사업 영역을 중앙처리장치(CPU)로 전환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새로운 도전에 충분히 준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CPU 분야에 대한 인텔의 자신감은 적자를 보면서도 매출의 30%를 연구개발에 쏟아붓고, 차세대 사업에 거침없이 인수합병(M&A)을 단행하는 공격성에 근간을 두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도 지금 미래 시장을 위한 확실한 기술 토대를 만들어놓지 않으면 10년, 아니 5년 뒤에 어떤 모습일지 장담하기 힘들다. 최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도 메모리 분야에 편중된 연구개발보다는 신사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와 더 공격적인 M&A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와 함께 ‘카운트다운’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지금의 파티는 머지않아 끝난다. 생존을 위한 ‘다음’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