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가 추진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 정보공개 방침에 대해 산업통상자원부가 제동을 걸면서 백운규 장관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한국GM 군산공장 폐쇄 등 굵직한 산업 정책 현안에 대해 컨트롤타워 역할을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산업부가 고용부의 폭주를 저지하면서 오랜만에 ‘이름값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18일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백 장관이 보잉과 화이자 등 현지기업으로부터 대규모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유치한 것도 산업부의 존재감을 되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백 장관은 “최근 철강 관세 면제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협상 원칙적 합의 등으로 한미 간 통상 관계의 불확실성이 완화됐기 때문에 미국 기업들이 한국에 안정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됐다”며 “국가별로 투자제한 조치를 펼치는 등 국경 간 투자가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미국 기업이 한국 투자를 (약속)했다는 점은 한국 경제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신뢰가 굳건하다는 의미다”고 말했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사진 왼쪽 앞에서 두번째)이 1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미국 기업 투자가들을 대상으로 라운드테이블을 개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소득주도성장 등 친(親) 노동 정책이 득세하면서 산업정책을 주관하는 산업부의 입지가 위축됐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산업부 장관에 ‘탈(脫) 원자력 발전 주의자’로 알려진 공대 교수 출신 백 장관이 취임한 것도 이같은 평가를 부추기는 요인이었다. 산업부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집행하는 부처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이전 정부에서 산업부가 수행했던 산업정책을 친(親) 대기업 편향 정책으로 인식했던 문재인 정권의 정서도 산업부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하지만 지난 17일 산업기술보호위원회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의 작업 환경 측정 보고서에 국가핵심기술이 포함됐다는 유권해석을 내리면서 산업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누그러지는 분위기다. 특히 백 장관이 공대 교수(한양대 에너지공학과) 출신의 전문성을 내세우면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핵심 기술 유출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는 분위기 조성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에 국가핵심기술이 들어있는지에 대해 판정한 주체는 반도체전문위원회 전문위원들이지만, 전문위원회가 속한 산업기술보호위원회 위원장은 백 장관이기 때문에 회의 일정과 의견 조율이 백 장관 주도로 이뤄졌다는 게 산업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백 장관은 지난 12일 기자들과 두차례 만나 “고용부는 노동자의 안전과 국민의 알 권리 등을 고민할 것이고, 산업부는 국가의 기밀사항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며 “산업부는 산업 기술이 외국이나 경쟁 업체에 유출될 가능성에 대해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 산업부 관계자는 “백 장관이 반도체전문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구체적인 의견을 두 차례나 밝혔던 점은 현안을 직접 컨트롤 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다른 산업부 관계자도 “백 장관이 공대 교수 출신으로서 국가기술은 보호돼야 한다는 전향적인 입장을 가졌던 점도 반도체전문위원회 판정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며 “삼성전자라는 국내 최대 기업의 주력 상품과 관련된 이슈라 각 경제 부처뿐 아니라 청와대에서도 직접 관심을 보였는데, 이들의 의견을 종합하는 데도 백 장관이 큰 역할을 했다”고 귀띔했다.

산업기술보호위원회의 결정을 주도했던 백 장관은 18일부터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 중이다. 지난해 7월 취임 후 백 장관은 미국과의 경제 현안 논의를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에게 거의 일임하다시피 했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통상 및 산업 주무부처 수장으로서 백 장관의 역할이 지나치게 적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그러나 백 장관이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 성과를 내면서 이런 분위기도 누그러들고 있다. 백 장관은 18일(현지시각) 보잉과 화이자 등 한국 투자에 관심이 있는 미국 현지 기업인들과 만나 3억1000만 달러 규모의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유치했다. 이 행사에는 금융, 정보기술(IT), 바이오, 항공, 석유화학, 신재생에너지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신산업과 전통 제조업 분야의 10개 기업이 참여했다. 이들 기업은 이날 만남에서 추후 9000만 달러의 추가 투자 의향을 밝히기도 했다.

백 장관에게는 숙제도 남아있다. 우선 한국GM이 신청한 부평공장과 창원공장의 외국인투자지역 지정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영국과 사우디 원전 수출도 해결 과제다. 사우디는 이르면 이달 중 원전 예비사업자 1차 후보군을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이 우선사업자로 선정된 영국 무어사이드 원전의 경우 원전 건설 및 운영 계획 등 세부적인 조건을 영국과 협의 중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백 장관은 그동안 한전, 한수원 사장이 없어 아랍에미리트(UAE)를 홀로 오가며 원전 세일즈 활동을 펼쳤다”며 “두 회사 사장이 잇따라 부임하면서 산업부와 함께 원전 수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총력전을 펼칠 계획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