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주기, 공개 방식, 협의 결과 명목화 여부 '3대 쟁점'
3대 쟁점 협의 결과에 따라 환율 절상 강도 정해질듯

지난 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거래일 대비 2.5원 내린 1067.1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종가와는 달리 전거래일대비 0.5원 오른 1070.5원에 출발했다. 미·중 무역전쟁 우려로 안전자산인 달러가 강세를 보였던 지난주 후반 분위기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원화 강세로 외환시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국의 외환시장 개입 정보 공개를 둘러싼 미국의 압박으로 촉발된 원화 강세 전망은 여전히 외환시장 바닥에 짙게 깔려 있었다. 10일 원·달러 환율도 하락세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의 외환시장 개입을 막기 위한 환율 협의를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개정 협정과 연계하려는 압박 전술을 펴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본격화한 지난달 말 이후 달러대비 원화 환율은 1.16% 떨어지면서 G20(주요 20개국) 중 멕시코의 페소(1.27%)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절상률을 기록했다. 한국 정부가 외환시장 주도권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인식이 원화 강세를 이끌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5일 “환율 주권은 분명히 우리에게 있으며, 시장에 급격한 쏠림이 있으면 분명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힌 것은 외환시장의 과도한 원화 강세 기대감에 견제구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김 부총리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 참여자들은 미국의 압박이 거셀 것으로 전망하는 분위기다. 특히 한국 정부가 주기적으로 발표할 것으로 보이는 외환시장 개입 보고서의 구체적인 공개 방식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양국간 환율 협의 쟁점은 개입 정보 공개 주기, 공개 세부 방식, 협의 결과의 명문화 여부 등 크게 3가지로 꼽힌다. 이들 쟁점이 어떻게 결론 나느냐에 따라 원화의 방향성이 결정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 정부는 외환시장 개입 규모를 공개하라는 IMF(국제통화기금)와 미국 재무부의 요구를 거부해 왔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공세가 거세지자 공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환율조작국 지정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해 원화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 기업을 간접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美 환율압박에 맞서는 韓 “국제통화국과 같은 방식은 곤란”...3대 쟁점은?

첫번째 쟁점은 외환시장 개입 정보의 공개 주기다. 미국 정부는 한국이 일본, 영국, 캐나다, 호주처럼 외환시장 개입 내역을 개입 후 한달 이내에 공개해야 한다고 압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뉴욕, 런던, 프랑크푸르트 등 전세계 주요 금융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엔화(일본), 파운드화(영국), 캐나다달러(캐나다) 등 기축통화와 원화를 같은 잣대에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원화는 이들 국제 통화와 달리 거래 유동성이 제한적이어서 쏠림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원·달러 현물이 거래되는 곳이 서울 외환시장 한 곳 밖에 없다는 점 등을 내세우며 미국측을 설득하겠다는 구상이다.

외환당국 안팎에서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조약에 따라 개입 내역을 공개키로 한 베트남, 싱가포르와 비슷한 방식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많다. 보고서에 시장개입 정보를 분기별로 담되, 공표 주기는 6개월 단위로 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올해 1분기와 2분기 개입 정보를 6월 이후에 한꺼번에 공개하는 방식이다. 미국도 외환시장 개입 규모를 순매수분만 각 분기 종료 후 40일이 지나서 공개하고 있다. 국제통화국 중 하나이면서도 외환시장 개입을 자주하는 스위스는 연 단위로 해마다 2월에 자료를 공개한다

두번째 쟁점은 개입 정보를 공개하는 방식이다. 미국은 시장 개입을 위한 달러 매수, 매도 내역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원·달러 환율이 급상승할 때 시행하는 달러 매도 개입은 미국 정부가 문제삼는 ‘인위적인 평가절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순매수 규모만 공개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외환시장의 급변동을 막기 위한 ‘스무딩 오퍼레이션(smoothing operation)’은 미국이 주장하는 ‘수출 경쟁력 확보를 위한 인위적인 자국 통화 평가절하 행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쟁점은 한미간 환율 협의 결과를 명문화할 것인지 여부다. 미국은 외환시장 정보 공개에 대한 한미 정부간 협의 내용을 MOU(양해각서) 형태로 명문화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강경책을 이끌고 있는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은 “우리는 환율 평가절하와 관련된 것을 한미 FTA 하위 합의(sub-agreement)에 넣었다”고 말한 바 있다.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관련 뉴스를 보고 있는 시중은행 외환딜러.

하지만 이같은 요구에 대해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의 외환당국자들은 매우 부정적이다. 특히 “MOU를 맺는 것은 환율 주권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 외환당국 관계자는 “외환시장 개입규모를 공개하는 것은 IMF 협의를 거쳐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결정해서 시행하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개입 규모 공개 방식에 따라 원화 절상폭 달라질 것”

외환시장에서는 한국 정부의 세부적인 외환시장 개입 관련 공개 방식은 미국 재무부의 환율보고서가 발표되는 이달 중순쯤이나,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IMF 춘계총회 및 G20 재무장관회의 시기에 확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김동연 부총리와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이 양자 회담을 통해 그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외환시장 전문가들은 한국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 정보를 공개하게 되면 원화절상 압력이 커질 수 밖에 없다고 예상한다. 한 외국계 은행의 외환딜러는 “지금도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 규모를 매우 근사하게 추정하고 있지만, 개입 시점과 규모, 의도 등을 파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면서 “개입정보가 공개되면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이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원달러 환율이 1000원대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급격한 환율 절상은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에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원·달러 환율이 1% 하락하면 총 수출이 0.51%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지난 3월 19일 G20재무장관회의 참석차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한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컨벤션센터에서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과 양자회담을 통해 환율 등을 논의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선호하는 대로 3개월 단위로 순매수 규모만 공개하는 방안에 미국 정부가 동의하면 원화 절상폭이 예상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조심스레 나온다. 한 시중은행의 외환딜러는 “한국 외환당국은 매도, 매수 개입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에 순매수 규모만 분기 단위로 공개하면 미국 정부가 이를 근거로 구체적인 개입 내역을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외환당국이 시장의 과도한 쏠림 현상에 대해 견제구를 날릴 수 있는 정도의 억제력은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