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전 8시 STX조선해양의 경남 진해조선소. 이 회사 노조 집행부가 비상대책위원회를 열었다. 이날은 STX조선해양 노사가 생산직 75% 감축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자구안과 노사 확약서를 산업은행에 내야 하는 '데드라인'이다. 노조 비대위원 사이에서 정부의 구조조정 방안을 받아들일지를 두고 의견이 갈렸지만 노조는 '강경 투쟁'을 계속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600여명 조합원에게 이런 방침을 설명했다. 노조는 이날 오후 대주주인 산업은행과 협상을 예고했지만 불발됐다. 오후 1시 30분부터 노사 간 마지막 담판을 위한 마라톤 협상이 시작됐고,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한때 세계 4위 조선사였던 STX조선은 경영난을 겪으며 2016년 '세금 먹는 하마'라는 비난 속에 법정관리(기업 회생 절차)를 신청했다. 작년 7월 13개월 만에 법정관리를 졸업하며 경영정상화 길을 가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강도 구조조정은 현재 진행 중이다. STX조선이 청산되면 본사와 협력업체 직원 2500여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STX조선 회생 가능하다더니…
STX조선이 법정관리 졸업 9개월 만에 또다시 고강도 구조조정에 나선 데는 채권단과 정부가 명확한 원칙을 세우지 않아 아까운 시간만 흘려보낸 게 원인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산업은행은 법정관리를 졸업한 STX조선으로부터 작년 11월 "고정비를 30% 안팎 줄이겠다"는 취지의 노사 확약서를 받았다. STX조선이 법정관리 졸업 이후 수주한 선박 11척에 대한 선수금환급보증(RG·조선사가 선박을 제때 건조하지 못할 경우 은행이 선수금을 대신 물어주는 지급보증)을 발급해 주는 대가였다. 하지만 자구안은 정부가 작년 12월 산업경쟁력강화 관계장관 회의를 열고 "새로운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히면서 유야무야됐다. 이후 STX조선과 성동조선에 대한 외부 회계법인 컨설팅이 시작됐고, 12월 말 백운규 산업부 장관은 "금융 논리로만 결정하지 않고 산업 측면의 영향을 보겠다"고 말했다. 새 판이 짜이는 상황이 되면서 채권단에서도 STX조선에 자구안 이행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1월 초 새해 첫 현장 방문으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를 찾아 "조선 경기가 곧 회복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채권단 안팎에서는 인력 조정 등 강력한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일자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문재인 정부가 노동집약 산업인 조선업 지원에 나설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를 키운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법정관리 졸업 너무 빨랐나
STX조선이 고비용 구조 등 경쟁력 회복이 안 된 상황에서 13개월 만에 법정관리를 조기 졸업한 게 지나치게 빠른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법정관리를 하면서 5조원 규모 출자전환이 이뤄졌고, 이자 비용 면제, 채무 상환 유예 등으로 STX조선의 재무 건전성은 많이 개선됐다. 하지만 당시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 상황이었다. 또 글로벌 조선 업황이 워낙 나빠 저가 수주에 나서는 중국 조선사와 경쟁에서 살아남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STX조선은 2016년부터 2017년 4월까지 신규 선박을 한 척도 수주하지 못하다 작년 4월에야 법정관리 이후 처음으로 탱크선 4척을 수주했다.
법원과 정부가 STX조선의 회생 가능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다른 것도 혼란을 불렀다. 법원은 법정관리 졸업을 허가하면서 앞으로 10년을 기준으로 STX조선의 정상화 여부를 판단해 회생 가능하다고 봤다. 하지만 정부가 외부에 의뢰한 컨설팅은 5년을 기준으로 회생 여부를 판단했고, STX조선의 청산 가치가 존속시키는 가치보다 더 높다는 결론이 나왔다. STX조선 관계자는 "앞으로 5년을 기준으로 따지면 국내 조선사는 모두 청산하는 게 맞는다"고 했다.
◇정부, 사후약방문에 장밋빛 전망까지…
정부는 지난 5일 조선산업 발전전략을 발표하고, 업계 자율의 합종연횡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중견 조선사를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수년 전부터 중견 조선사 지원을 호소했는데 모두 망한 뒤 이제 와서 어느 나라 중견 조선사를 육성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대형 조선 3사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일감 부족에 허덕이는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생산직을 대상으로 순환휴직을 했고, 16일부터는 2년 만에 희망퇴직을 받는다. 최근 2년 사이 인력 3300여명을 감축한 삼성중공업은 올해도 최대 2000여명을 더 줄여야 한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부는 대형 3사가 매년 3000명을 채용해 2022년까지 직원 수를 10만명에서 12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일감이 없어 있는 직원도 내보내야 하는 처지인데 정부는 여전히 숫자 놀음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