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0일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에 "배아줄기세포에서 자라난 망막세포를 80대와 60대 노인성 황반 변성 환자의 눈에 이식해 부작용 없이 시력을 획기적으로 회복시켰다"고 밝혔다. 환자들은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몰라볼 만큼 시력이 약했지만 1년 만에 신문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미세 바늘로 인간 배아(수정란)에서 배아줄기세포를 추출하는 모습.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지던 배아줄기세포가 실명 환자의 눈을 뜨게 하면서 다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배아줄기세포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긴 수정란(배아)에서 인체의 220여 가지 세포로 자라는 원시(原始) 세포이다. 올해는 1998년 미국 위스콘신대의 제임스 톰슨 교수 연구진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처음으로 사람 수정란에서 배아줄기세포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최근 미국과 한국·영국·중국 등에서 10여건의 배아줄기세포 치료제 임상시험이 진행되면서 상용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윤리 논란 겪으면서 침체기 들어서

배아줄기세포는 사실 지난 20년의 상당 부분을 암흑기로 보냈다. 배아줄기세포는 나중에 사람이 될 수도 있는 수정란을 파괴해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첨예한 윤리 논쟁을 불렀다. 2001년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더 이상 정부 연구비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상황은 복제 배아줄기세포 연구 조작으로 인해 더욱 악화됐다. 황우석 박사는 2005년 사람의 피부세포를 난자와 결합해 복제 배아줄기세포를 수립했다고 발표했다. 환자 자신의 세포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면 면역거부반응이 없는 맞춤형 치료가 가능하다. 하지만 곧 논문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배아줄기세포 연구 전체를 크게 위축시켰다.

제약바이오업계는 대신 윤리 문제가 없는 성체줄기세포로 눈을 돌렸다. 사람의 골수와 지방 등에도 줄기세포가 있다. 배아줄기세포처럼 다양한 세포로 자라지는 못하지만 몇 가지 세포는 만들 수 있다. 국내 바이오기업 파미셀은 2011년 세계 최초로 성체줄기세포로 급성심근경색 치료제를 개발해 승인을 받았다. 현재 전 세계에서 허가받은 성체줄기세포 치료제 7개 중 4개가 한국에서 개발됐다.

윤리 논란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배아줄기세포도 등장했다. 일본 교토대 야마나카 신야 교수는 2007년 피부세포에 특정 유전자를 주입해 배아줄기세포와 유사한 유도만능줄기세포(iPS세포)를 개발했다. 환자 맞춤형 배아줄기세포를 난자나 수정란을 파괴하지 않고도 얻게 된 것이다. 신야 교수는 이 공로로 2012년 노벨상을 받았다.

망막 치료제로 먼저 상용화 예상

배아줄기세포가 다시 살아난 것은 바이오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배아줄기세포 배양 성공률을 1%에서 27%로 향상시켰다. 그만큼 수정란을 덜 만들어도 된다는 말이다. 또 심근세포, 신경세포 등 10여 가지 세포로 분화시키는 방법도 확립했다. 인간배아줄기세포 복제도 2013년 미국 오리건 보건과학대 연구진이 성공시켰다. 이듬해 차병원 연구진도 복제에 성공했다.

iPS세포와의 경쟁에서도 우위가 나타났다. 예컨대 환자의 피부세포로 iPS세포를 만들었더니 세포 기능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미 질병으로 손상된 세포로 줄기세포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정범 울산과학기술원 교수는 "iPS세포의 상용화를 위해서도 기준이 될 배아줄기세포가 필요하다"며 "두 줄기세포를 비교하면 iPS세포의 문제점을 해결할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제약바이오업계는 2010년대 들어 배아줄기세포 치료제의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 1위 제약사인 미국 화이자는 이번에 연구 결과를 발표한 영국 UCL 연구진과 망막 질환 치료제의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 제약사 아스텔라스와 국내 차바이오텍 등 전 세계에서 6건의 망막 질환 치료제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다. 중국은 지난해 세계 최초로 파킨슨병 치매 환자의 뇌에 배아줄기세포로 만든 신경세포를 주입하는 임상시험을 시작했다. 이 밖에 심부전·당뇨병·척추손상 등에 대한 임상시험도 진행 중이다.

배아줄기세포는 신약 개발에도 유용하다. 국내에서는 인터파크 바이오융합연구소가 배아줄기세포를 특정 세포로 자라게 한 다음, 이를 입체 구조로 만든 미니 장기인 오가노이드(orgnoid)를 개발하고 있다. 실제 장기와 같은 형태와 구조를 가져 동물·세포실험을 대체할 수 있다. 서울대·연세대·건국대 등에서도 배아줄기세포를 신약 시험용으로 연구하고 있다.

줄기세포 임상시험 건수 중국에 역전

글로벌 줄기세포 시장은 2016년 506억달러(약 53조7800억원)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잉크우드 리서치는 앞으로 연평균 25.8%의 고성장을 이뤄 2025년에는 3944억달러(419조24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최근에는 중국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1999~2016년 전 세계 임상시험 314건 중 미국이 155건이고 한국이 46건으로 2위였지만, 2014년부터 3년간 임상시험 건수는 미국(60건)·중국(24)·한국(20) 순이다. 중국은 특히 2015년 배아줄기세포 임상시험의 근거법을 만들면서 발전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과감한 규제 철폐로 우리나라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동률 차의과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배아줄기세포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수정란이나 난자 이용 조건이 외국보다 까다로워 연구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런 지적을 고려해 지난해 말부터 생명윤리법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배아(胚芽)줄기세포

정자와 난자가 만난 지 5일쯤 된 배아(수정란)에서 만들어지는 일종의 원시(原始)세포로, 인체 모든 종류의 세포로 자란다. 유도만능줄기세포(iPS세포)는 피부세포같이 다 자란 세포에 특정 유전자를 집어넣어 배아줄기세포 상태로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