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금·토지 구입 위해 반도체 회사로 위장
韓기업 특허 노린 합작법인 제안도 부지기수
노하우 부족...1~2년내 큰 전환점 못만들 듯

국내 한 반도체 장비회사 임원인 김모씨는 최근 중국의 신생 반도체 회사라는 A사의 초청을 받아 중국을 다녀왔다. 이름도 생소한 기업이었지만 중국 정부가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하면서 신생 반도체 기업들이 잇달아 설립되는 터라 별 의심 없이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현장을 가보니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반도체 생산 공장이라고 해서 갔는데, 텅빈 건물에 포장도 뜯지 않은 고가의 반도체 장비만 잔뜩 쌓여 있었다. 현장에서 수소문 해보니 반도체 회사로 알고 있던 A사는 현지 부동산 투자회사였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및 반도체 장비업종과 관련해 막대한 보조금, 세제 혜택, 토지 임대 등 다양한 분야를 지원하자 혜택을 누리기 위해 반도체 기업으로 위장한 것이다. A사는 필요하지도 않은 고가의 반도체 장비 구매를 하고 금액의 50%에 해당하는 금액을 정부로부터 지원 받았다.

삼성전자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 내부.

26일 국내 반도체 장비업계에 따르면 중국 정부의 지원금을 노리고 미국, 일본, 한국 등지에서 반도체 장비를 구매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상당수 업체들은 실제 반도체 및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생산에 해당 장비를 활용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정부 보조금을 노리고 고가의 장비를 구매한 뒤 중고로 되파는 경우도 있다.

중국은 2014년 6월 '국가 반도체 산업 발전 강령'을 발표해 국가반도체 산업투자펀드를 설립하고 최근 2년간 자국 반도체 산업에 1500억위안(약 26조원)을 쏟아 부었다.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업고 중국 반도체 기업은 글로벌 기업에 대한 공격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하고 있으며, 각국에서 핵심 장비 및 인력을 끌어오고 있다.

하지만 정부 자금이 '눈 먼 돈'이나 다름없이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 업계 전언이다. 이달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는 '세미콘차이나 2018' 전시회에 참가한 국내 한 장비업체 대표는 "합작법인을 만들자는 제의를 받고 가보니 물품 창고에 장비만 쌓아놓은 회사도 있었다"며 "사실상 아무 기술도 없이 국내 기업이 갖고 있는 특허만 노리고 접근하는 회사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중국과 합작법인을 만들 경우 중국 이외의 국가와 갈등을 우려해 합작법인 제안을 거절한 사례도 있다. B업체 대표는 "국내 사업 실적이 어렵기 때문에 중국측에서 거액을 제시하며 합작법인을 제안했을 때 귀가 솔깃했던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최근 국제 정세로 봤을 때 반도체 장비 기업이 중국에 투자를 큰 투자를 받거나 합작법인을 세우면 국제적으로 '왕따'가 될 것이 뻔했기에 거절했다"고 설명했다.

D램, 낸드플래시 등 한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의 텃밭에 진출하려는 중국 기업들의 기술력이 검증 없이 부풀려진 것과 달리 아직 초보적인 단계도 진입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칭화유니그룹 등 중국 반도체 굴기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기업마저도 10년~20년 수준의 경력을 갖춘 메모리 생산 관련 엔지니어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웅 서플러스글로벌 대표는 "중국이 이미 세계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LCD의 경우 상당 부분은 생산장비만 좋으면 가능한 산업이지만 메모리 반도체는 전혀 다르다"며 "특히 한국의 주력 수출 품목인 D램의 경우 똑똑한 사람 몇몇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노하우를 집단적으로 축적해야 돌파구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현지에서 직접 보면 중국 반도체 산업이 1~2년 안에 큰 전환점을 만들어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