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자상거래업체 라쿠텐은 지난해 7월 미국 의료 벤처기업 아스피라이언 세라퓨틱스 지분 20%를 인수해 암치료사업에 진출했다. 아스피라이언은 신체에 무해한 근적외선을 이용해 부작용을 줄인 새로운 암치료법인 광면역치료법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이 기술에 대한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라쿠텐이 아스피라이언을 인수한 이유는 전자상거래 회원의 건강빅데이터와 결합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기 위해서다. 라쿠텐은 그룹 차원의 70여개 사업에 유전자검사서비스와 수면기록앱 등의 데이터를 조합하면 생활습관이나 건강상태를 토대로 한 최적의 암치료법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라쿠텐이 빅데이터를 활용한 의료서비스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배경에는 빅데이터를 산업경쟁력의 원천으로 활용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의지가 깔려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1월말 자율주행, 바이오, 소재, 플랜트, 해운 등 5개 분야의 데이터 서식에 통일된 기준을 적용하는 빅데이터 표준화 특별조치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자율주행용 3차원 지도 데이터, 화학플랜트 등 가동 데이터, 드론이 수집한 토지측량 데이터 등을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일본 정부는 기업에 분산된 다양한 정보를 데이터뱅크에 모은 뒤 유용한 데이터로 가공해 기업이나 연구기관에 제공하는 ‘인정(認定)데이터뱅크’를 추진 중이다.

일본 경제는 정부 주도의 빅데이터 개방 정책으로 산업 현장에 활기를 되찾고 있다. 사진은 일본의 한 구직소개소에서 젊은이들이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궁극적으로 일본 정부는 오는 2020년까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민간기업 등이 보유한 빅데이터를 공유하는 포털사이트를 개설할 계획이다. 민관(民官)의 빅데이터 칸막이를 없애겠다는 구상이다. 이 포털사이트는 농업, 교통, 인프라, 각종 재난방지, 의료 등이 주요 대상이다. 농가와 농협이 갖고 있는 파종, 물관리, 토양관리 정보, 택시·버스회사가 보유한 도로, 지도, 교통량 데이터, 익명 처리된 주요 의료서비스 이용자의 건강 정보 등이 제공될 전망이다. 이 포털사이트에서는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폭넓은 데이터를 금새 찾아내 내려받을 수 있게 된다. 빅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려고 하는 사업자들의 기반을 제공하겠다는 게 일본 정부가 제시하는 비전이다.

◇ 시민단체 반대·개인정보보호 장벽에 가로막힌 빅데이터 활용

4차산업혁명 등 신산업 육성에 가장 필요한 바탕은 빅데이터다. 그렇지만 한국은 각종 칸막이 규제에 가로막혀 있다. 이에 혁신벤처단체협의회(혁단협)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 등 과학기술단체들은 지난 1월 10일부터 데이터 족쇄 풀기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과도한 데이터 규제로 인해 신산업·융합산업의 발전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과학계와 혁신벤처업계가 힘을 합치자는 게 서명운동의 취지다. 벤처기업과 과학기술계 등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진행된 1단계 서명운동에 1만5000명 가량이 참여하는 등 높은 호응을 얻고 있다.

한국 정부의 대응은 일본 정부와 판이하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19일 최종구 위원장 주재로 ‘금융분야 데이터활용 및 정보보호를 위한 간담회’를 열고 금융분야 데이터활용 및 정보보호 종합방안을 제시했지만, 한국 정부의 빅데이터 정책은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 중국, EU(유럽연합)에 한참 뒤져있는 ‘아기 걸음마’ 수준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세계 최고 수준의 개인정보 보호 규제 때문이다. 데이터 수집, 분석, 활용 등 모든 단계에서 규제의 덫이 놓여있다.

정부는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빅데이터 활용도를 높이겠다는 계획을 제시했지만, 개인정보보호법, 정보통신망법, 의료법, 생명윤리법, 신용정보법 등 실정법 곳곳에 규제조항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개인정보 수집에 대한 규제완화는 인권 침해 가능성을 우려하는 일부 시민단체와 현재 여권 일부 의원들의 반대로 한 걸음도 못 나아가고 있다. 이들은 특히 보건의료 정보를 빅데이터로 활용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완강한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2017년 4월 25일 서울 강남구 삼성멀티캠퍼스 강의실에서 수강생들이 4차 산업혁명 대비 직업 훈련 과정의 하나인 ‘인공지능 기반 빅 데이터 소프트웨어 개발’ 강의를 듣고 있다.

지난 1월31일 국회 4차산업혁명특별위원회에서 송희경 자유한국당 의원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사이의 논쟁은 빅데이터 활용 논의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지 못하는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송 의원은 휴대폰 음성정보로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 예방 서비스를 만든 스타트업이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이 서비스를 출시하지 못하는 사례를 언급했다. 송 의원은 그러면서 “시민단체들이 비식별화된 데이터 활용을 반대하고 있는데, 행안부가 보호와 진흥의 조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라고 질의하자, 김 장관은 “개인정보 보호라는 것이 작은 둑이 하나 뚫리면 그 다음부터 걷잡을 수 없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과거 역사에 분명히 악용하는 사례가 나타났던 것도 사실”이라며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 ’가시적인 성과도출’에 사로잡힌 정부…규제완화 등 근본 과제는 외면

빅데이터를 활용한 4차산업혁명 기반 산업육성은 혁신성장의 핵심 요소다. 하지만 빅데이터 정책은 지난해 9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처음 제시된 혁신성장 주요대책에서 아예 빠져 있다. △혁신생태계 조성 △혁신거점 구축 △규제재설계 △혁신인프라 강화 등 4개 영역 15대 대책으로 구성된 주요추진대책 중 빅데이터 활용도를 높이겠다는 구상은 찾아볼 수 없다.

정부는 뒤늦게 행정안전부를 중심으로 공공기관이 관리하는 공공데이터를 개방하겠다는 원칙을 밝혔지만 현재 정부의 움직임은 공개 가능한 공공 데이터가 어떤 것인지 정도를 파악하는 전수조사를 실시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민간에서 요구하는 음성 등 비식별 생체정보 등에 대한 빅데이터 활용 문제는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의 혁신성장 논의에서 빅데이터 개방 문제가 빠져있는 것은 ‘가시적인 성과도출’ 중심으로 사업이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28일 혁신성장 전략회의에서 “혁신성장의 개념은 추상적일 수밖에 없지만, 개념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사업을 통해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며 “혁신성장을 체감할 선도사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는 게 중요하다”고 주문했다.

이후 정부의 혁신성장 대책은 △10조원 규모의 혁신모험펀드 조성 △융·복합콘텐츠지원펀드 조성 △보건산업 혁신창업지원센터 설립 △혁신성장 공모전·경진대회 △혁신·창업 생태계 조성을 위한 판교 제2 테크노밸리 활성화 방안 등에 매진하고 있다. 규제완화와 빅데이터 개방 확대 등 혁신성장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만드는 정책은 당위성을 강조하는 구호 수준에 머물러있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 국회 관계자는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가 개념이 모호하다는 논란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초한 것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그러다보니 국회를 거쳐야 하는 입법과제보다는 펀드 조성과 창업 공간 제공 등 단기 성과 도출이 비교적 용이한 사업 중심으로 정책역량이 집중되는 듯 하다”고 말했다.

경제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한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경제부처 장관들.

◇ 제 역할 못하는 ‘경제관계장관회의’…컨트롤타워 부재 논란

규제완화와 빅데이터 활용 등 근본적인 혁신성장 과제들이 속도감있게 추진되지 못하는 것은 컨트롤타워 등 사업 추진체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혁신성장 사령탑은 경제부총리”라고 규정했지만, 이 지침은 각 부처의 행정현장에서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주재하는 경제관계장관회의가 혁신성장 정책의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는지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실제로 정부가 제시한 15개 혁신성장 주요대책 중 경제관계장관회의를 통해 발표된 것은 모태펀드 활성화 등 혁신창업 종합대책, 판교창조경제밸리 활성화 방안, 한국형 메이크스페이스 구축 방안, 서비스산업 혁신 전략 등 기재부가 정책 수립을 책임지는 정책들 밖에 없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대책 수립을 맡은 제조업 부흥전략과 지역클러스터 활성화 전략 등은 국회 산업통상위 보고에서 공개됐고, 나머지 대책들도 대부분 부처 자체 발표 또는 보도자료 형태로 제시되는 수준이었다.

정부 관계자는 “혁신성장 정책이 부처 간 소통과 협업을 통해 속도감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컨트롤타워가 확고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라며 “각 부처가 제각각 혁신성장 대책을 내놓고 있다보니 어떤 정책이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 조차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혁신성장 정책에 대한 조정이 제각각 이뤄지고 있는 것도 혼선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핵심 정책인 규제완화는 국무조정실이, 빅데이터 활용은 행정안전부가, 4차산업혁명 시범 사업 등은 4차산업혁명위원회 등이 주관하고 있다. 각 부처에서는 정책 수립 완성도를 따지는 기획재정부와 업무를 협의하면서 경제관계장관회의를 통해 정책을 추진하는 것보다 4차산업혁명위원회 등을 거치는 게 훨씬 편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정부가 혁신성장을 경제정책의 3대축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최저임금 근로단축 등 노동·분배와 관련한 이슈에 비해 적극성이 떨어지고 있다”며 “일자리 창출의 주체인 기업들의 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과감한 규제완화를 더이상 늦춰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