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업계 “금융당국이 명확한 보험금 지급 기준 제시해야”

지난 4일부터 존엄사를 합법화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지만 보험업계에선 사망보험금 지급 기준에 존엄사 관련 규정이 없어 혼란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생명보험 가입자가 연명의료를 거부하거나 중단해 사망에 이를 경우 현행 표준약관상 사망보험금을 어떻게 지급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

생명보험은 사람의 사망으로 파생되는 위험을 보상하는 상품이다. 사망 원인에 따라 보험금 지급 여부와 규모가 다르다. 존엄사는 사망에 이르는 과정에서 인위적인 요인이 개입할 수 있어 사망보험금 지급에서 논란이 될 수 있다.

△조선DB
보험업계에선 금융당국이 존엄사 사망보험금 지급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조속히 마련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아직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연명의료란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시도하는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혈액투석·항암제투여 등 4가지 의료행위를 뜻한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 스스로 연명의료 여부를 결정하도록 제도화해 환자의 존엄성과 가치를 보장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환자가 연명의료를 거부하거나 중단할 수 있는 조건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환자가 의사표현능력이 있으면 연명의료계획서(말기 환자인 경우)를 받거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담당의사 2인의 확인이 필요하다.

환자가 의사표현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또는 의사 2인의 확인과 함께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 등 가족 2인 이상의 확인이 추가로 필요하다.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이 없으면 형제·자매가 대신할 수 있다. 환자의 의사를 아예 확인할 수 없고 의사표현도 불가능할 때는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와 의사 2인의 확인이 필요하다.

△보험연구원 제공
◇ 존엄사는 자살인가 아닌가

존엄사 사망보험금 지급과 관련된 쟁점은 환자의 사망원인을 ‘본인 의사에 따른 연명의료 중단(자살)’으로 볼 것인지 여부다. 연명의료법에는 ‘연명의료중단에 의해 환자가 보험금 지급에 불이익을 받아선 안된다’고 명시됐다. 그러나 보험업계에서는 연명의료 거부에 의한 사망은 사망 과정에 본인의 의도가 반영되기 때문에 이를 자살로 봐야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다.

현행법상 자살과 같은 보험가입자의 고의적인 사망은 보험사의 보험금 지급 면책사유로 인정된다. 단 생명보험 가입자가 재해사망특약에 가입한 후 계약체결일로부터 2년이 지나 자살하면 보험금을 지급한다. 존엄사를 자살로 본다면 특약 가입 2년이 지난 계약자를 제외하면 원론적으로 보험사가 사망 보험금 지급을 거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행 보험약관에는 자살보험금 지급 면책 예외조항으로 ‘피보험자의 심신상실에 의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 자살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규정도 있다. 이를 감안하면 연명의료 환자의 심신상실 상태에 따라 향후 보험금 지급의 쟁점이 될 수도 있다.

또 보험상품은 사망에 관한 위험보장을 목적으로 ‘불확정한 사고’(상법 638조) 또는 ‘우연한 사건’(보험업법 2조 1호) 발생에 대해 보험금을 지급한다고 명시돼 있다. 존엄사의 경우 환자 본인(혹은 가족)의 의도가 반영된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의 우연성을 둘러싸고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보험연구원 관계자는 “존엄사를 자살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존엄사에 대한 사례별 보험금 지급 사유를 분명히 해둬야 향후 분쟁의 소지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보험업계 “분쟁 소지” 우려...금융당국 입장 정리 못해

존엄사에 대한 보험업계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직 없다. 다만 보험업계에서는 향후 존엄사와 관련한 사망보험금 지급에서 가입자와 분쟁의 소지가 있다고 우려한다. 한 생보사 관계자는 “현행 표준약관에는 존엄사에 대한 규정이 없다”며 “분쟁 소지를 없애기 위해선 금융당국이 정확한 해석을 내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존엄사 보험금 지급과 관련해 고객 분쟁의 소지가 있다고 보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금융분쟁조정세칙’을 개정해 존엄사 사망보험금 지급 여부를 분쟁조정 대상에 포함했다.

그러나 금감원은 존엄사 보험금 지급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아직 정하지 못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아직 표준약관 개정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다만 존엄사를 어떤 식으로 규정할지 대해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오승연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금융당국이 논란의 소지를 없앨 수 있도록 업계와의 논의를 거쳐 표준약관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