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치료제와 줄기세포 치료제 개발이 최근 다시 활기를 띠면서 생명윤리법 개정이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생명윤리법은 인간 배아줄기세포나 유전자 치료 등 생명과학을 연구할 때 지켜야 할 사항을 규정하는 법으로 2004년 제정됐다. 그동안 몇 차례 일부 개정됐지만 여전히 '구시대적 규제'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를테면 인간 배아 연구를 진행할 수 없다는 법 조항 때문에 생명공학 기술을 갖추고도 정작 실험은 외국에 나가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바이오 의약품 시장이 커지면서 바이오 산업 육성 차원에서 하루빨리 생명윤리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바이오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와 기초 연구를 총괄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전문가 의견 수렴에 나서면서 생명윤리법 개정 움직임이 탄력을 받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최근 바이오 분야 범부처 종합 조정 기구인 '바이오특별위원회'를 열고 생명윤리법 개정 논의를 시작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말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공청회에서 "배아줄기세포와 유전자 가위 연구 허용 범위를 선진국과 같은 수준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바이오 연구 규제가 풀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배아(수정란)에서 배아줄기세포를 추출하는 모습. 한국은 유전자 가위와 줄기세포 치료제 개발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추고도 생명윤리법 때문에 연구에 제약을 받고 있다.

복지부·과기정통부 중심, 법 개정 의견 수렴

현행 생명윤리법 제47조는 유전자 치료 임상 연구 대상 질환의 범위를 '암,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등 생명을 위협하거나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는 질병'에 한정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현재 이용 가능한 치료법이 없거나 유전자 치료 효과가 다른 치료법과 비교하여 현저히 우수하리라고 예측되는 치료를 위한 연구'에 한해 임상 연구를 허용하고 있다. 치료법이 이미 있다면 아무리 좋은 유전자 치료 기술도 연구를 통해 상업화하기 어려운 셈이다.

게다가 배아(수정란) 유전자 교정, 연구 목적 배아 생성은 기초 연구와 임상 연구를 구분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금지해 연구의 자율성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 출연 연구 기관의 한 책임연구원은 "황우석 사태 이후 생명과학 연구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이후 지금까지 거의 바뀌지 않았다"며 "유전자 치료 대상 질환을 일부 질환으로 제한한 곳은 한국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런 우려가 꾸준히 제기되자 과기정통부는 최근 생화학분자생물학회 등 생명과학 분야 여섯 학회를 대상으로 생명윤리법 개정에 대한 의견을 모았다. 지난 7일에는 공청회에서 수렴한 의견을 담은 '바이오 R&D 혁신을 위한 생명윤리법 개정 방향'을 발표했다.

의견 수렴 결과 현장 연구자들이 요구하는 개선안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됐다. ▲현재 유전자 관련 치료와 배아 연구가 희소 난치병 22가지 외에는 원천적으로 연구가 차단돼 있는데, 이를 영국·미국·일본 수준으로 제한 해제 ▲지금처럼 허용하는 질환을 정하고 그 밖의 모든 경우를 제한하는 '포지티브 규제'에서, 제한할 대상만 한정하는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 ▲생명윤리법 규제로 심의 기관과 절차가 중복되는 '이중 규제' 해소 등이다.

이동률 차의과대 교수는 "기관 자체 생명윤리위원회(IRB)와 대통령 직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를 거치면 최장 1년이 넘게 심의가 걸리는데, 이런 긴 절차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는 연구도 있다"고 말했다. 이명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원은 "생명 윤리가 상당히 보수적인 미국에서도 인간 배아 기초 연구는 금지하지 않는다"며 "생명윤리법은 연구에서 인간 존엄성을 강조하는 기본 정신만 남기고 연구 자체는 개별법으로 분리해 따로 다뤄야 한다"고 말했다.

바이오 업계 "기술 변화가 법에도 반영돼야"

생명윤리법 개정에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곳은 바이오 업계다. 최근 한국은 바이오 벤처기업들이 최근 잇따라 대규모 기술 수출에 성공하면서 큰 성장을 이룬 듯 보이지만 여전히 규제에 막혀 신약 개발에 차질을 빚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규제가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의약품을 출시하지 못하거나 보건 당국의 판매 허가를 받은 뒤에도 판매가 제한당하는 일이 생긴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별다른 연구 제약이 없는 해외에서는 유전자 치료제, 줄기세포 치료제 등 차세대 바이오 의약품 개발이 활발하다. 영국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은 지난 6월 세계 최초로 줄기세포 유전자 치료제 '스트림벨리스'를 유럽에서 허가받았다. 스위스 노바티스는 지난 8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 면역 유전자 백혈병 치료제 '킴리아' 판매를 허가받았다. 이 치료제는 환자의 면역세포를 꺼내 암세포를 탐지하는 능력을 가진 유전자를 집어넣은 뒤 몸에 재주입하는 차세대 유전자 치료제다.

유명철 경희대 의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는 "한국은 전 세계에서 상용화한 줄기세포 치료제 중 약 절반을 개발할 정도로 역량을 갖췄지만 규제와 정책 미비로 산업 성장이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앞으로 국내에서도 유전자 치료제 개발이 크게 늘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관련 규제 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