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 초밥용 김을 수출하는데 물꼬를 튼 대학생 신인화(23)씨가 지난 7월 밀라노의 대형마트에서 진열된 식품을 살펴보고 있다.

충남 보령의 중소기업 대천맛김은 지난 10월 이탈리아에 두툼한 초밥용 김 2만5000달러어치를 처음 수출했다. 추가 주문이 밀려와 다음 달에는 9만달러어치를 실어 보낼 예정이다. 이 김은 로마와 밀라노의 일식당 300여 곳에 깔린다. 그동안 국내 업체가 이탈리아 교민 시장에 조미김을 판 적은 있지만 현지 식재료 업체를 발굴해 초밥용 김을 수출한 것은 처음이다. 대천맛김을 파는 유통업체 와이비엠씨엠씨의 유법목(54) 대표는 "교민 시장을 놓고 한국 업체들끼리 제 살 깎아 먹기를 한 게 아니라 중국산 김이 장악한 초밥 시장을 빼앗아 온 것"이라며 "초밥용 김은 같은 무게를 수출했을 때 조미김보다 매출이 5배는 된다"고 말했다. 그는 "값싼 중국산 김을 쓰던 이탈리아 일식당들이 품질 좋고 한·EU FTA(자유무역협정) 덕에 값도 떨어진 우리 김을 계속 쓰겠다고 한다"며 "이탈리아에 이런 시장이 있는지 몰랐는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젊으니까 '해외 맨땅에 헤딩'

이탈리아의 현지 유통업체를 뚫은 것은 전문 세일즈맨이 아니라 대학생 신인화(23·한국외국어대 이탈리아어통번역학)씨였다. 식품 상품기획자(MD)를 꿈꾸는 신씨는 지난 5월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농수산식품 청년 해외 개척단 '아프로(AFLO·Agrifood Frontier Leader Organization)'에 선발되면서 이탈리아 땅을 밟았다. 해외 시장 개척은 '맨땅에 헤딩' 같았다. 신인화씨는 "음식에 대한 자존심이 강한 이탈리아인들은 한국 음식은 맛보려고도 안 했다"며 "커피믹스를 선물로 주면 '커피는 에스프레소지' 하면서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어떤 현지 업체는 "제품 포장지에 김 대신 일본어로 '노리(김)'라고 써 오면 팔아주겠다"고 면박을 주기도 했지만 절망 대신 오기가 생겼다. 그는 현지 일식당과 대형마트를 찾아다니다 식재료 유통업체로 거슬러 올라갔다. 수출 계약을 성사시킨 로마 식재료 업체와는 "질 좋은 한국 김을 소개하고 싶다"는 전화 한 통으로 시작했다. 그 후 메일 30통을 보내고 세 번 찾아간 끝에 마음을 얻었다.

中 사드 보복이 전화위복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수산식품유통공사는 올해 청년 개척단을 만들어 세계 14개국에 60명을 보냈다. 14개국은 이탈리아, 인도,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카자흐스탄 등 아직 우리나라가 뚫지 못한 미개척지다. 농수산식품 수출을 담당하는 공사 입장에선 중국, 일본, 미국 등에 편중된 시장을 다변화하기 위해 보낸 일종의 선발대다. 시장다변화TF팀 서권재 과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중국 시장에 올인하다시피 해왔는데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보복 한 방에 휘청거렸습니다. 활로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해외 시장 개척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들을 뽑아 수출을 원하는 중소기업과 1대1로 짝을 지었다. 한 달간 공사와 수출 중소기업에서 정직원처럼 영업 교육도 시켰다. 외국어에 능통한 청년들은 신씨처럼 수출 기업을 도와 시장 조사를 하고 거래처를 발굴했다.

이승우가 뛰고 있는 이탈리아 프로축구단에 잡채·불고기 대접 - 지난 11월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연 한식 파티 행사장의 모습. 축구선수 이승우가 뛰고 있는 헬라스 베로나FC 구단 선수들이 잡채와 불고기 등을 맛보고 있다.

한승재씨(25·홍익대 불문학)와 최별이(22·충남대 생물과학)씨 등은 축구선수 이승우가 뛰고 있는 이탈리아 세리에 A리그의 헬라스 베로나 FC 구단과 한국 음식 시식 행사를 성사시켰다. 축구팬인 한씨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축구를 좋아하는 점을 노려 축구단에 메일을 보냈다"며 "축구단을 끼니 현지 최대 일간지를 포함해 10곳이 넘는 매체에 한식 기사가 나갔다"고 했다.

청년은 취업 성공, 중소기업은 수출 성공

해외 시장 개척 경험은 청년들 생각도 바꿨다. 취업에 성공한 사례도 나왔다. 지난 5월 인도에 파견돼 김치 수출에 기여한 대학생 김보고(26·성균관대 정치외교학)씨는 8월부터 인도 남부 첸나이의 현지 식품 유통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그를 눈여겨본 현지 업체가 스카우트한 것이다. 그는 "인도에 오기 전에는 취업 걱정 때문에 불안했는데 이제는 두려움이 사라졌다"며 "최고의 식품 무역 전문가가 되겠다"고 했다.

파스타의 나라 이탈리아에 쌀국수와 쌀떡 수출 길을 연 김선경(24)씨는 올해 농수산식품유통공사 직원으로 뽑혔다. 그는 "수출 상품 하면 휴대폰이나 반도체만 생각했는데 우리 쌀떡이 팔릴 줄은 몰랐다"며 "반도체 시장은 포화 상태지만 여긴 열정만 있으면 깃발 꽂을 땅도 널렸다"고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유명 요리학원에 해초, 된장, 고추장 등 한국산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반을 개설한 김민진(24·이화여대 정치외교학)씨는 "세계 경제를 보는 눈이 더 넓어졌다"고 했다.

내수 경쟁에 지친 중소기업들은 청년들 덕분에 새 먹거리를 찾았다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대천맛김은 내년에 전남 목포에 초밥용 김 전용 공장을 세우고 직원도 더 뽑을 계획이다. 황은정(24·오뚜기 취업)씨와 함께 남아공에 전지분유와 율무차 수출 길을 연 희창유업의 김성식 대리는 "청년의 국제 감각과 열정, 우리 회사의 제품력이 결합하니 석 달 만에 거래처를 찾을 수 있었다"며 "남아공을 전진기지 삼아 아프리카 시장을 공략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