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학계가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국원자력학회는 지난 14일 정부가 발표한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탈원전 정책 이행을 위한 짜맞추기'라고 비판하며 "에너지 정책을 원점에서 다시 정해야 한다"고 18일 밝혔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은 정부가 2년마다 발표하는 것으로, 정부 에너지 정책의 기본 틀이다.
원자력학회는 정부의 계획이 현실을 제대로 담지 않았다며 크게 5가지 허점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선 ▲전력 수요 예측을 축소했고 ▲발전원 단가 또한 요금 인상 요인을 포함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탈원전 정책 밑그림'을 마련하기 위해 축소 보고됐다는 것이다. ▲유탄소(석탄·LNG) 발전원 증가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안정성이 보장된 원전 조기 폐쇄 방침이 법적 근거 없는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학계는 이런 탈원전 정책 기조 아래에서 ▲원전 수출도 사실상 불가능해져 공급망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봤다.
김학노 한국원자력학회장은 "정부의 8차 전력수급계획안에는 정부의 맹목적인 탈원전 의지가 숨어 있다"며 "에너지 정책은 국민의 에너지 복지, 경제성, 안정성, 환경성, 수급안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다른 학회 관계자는 "에너지 전환의 목표는 탈원전이 아니라 탈탄소가 돼야 한다"고 밝혔다.
① 최대 전력 수요 과소 예측
정부는 2030년 최대 전력 수요를 100.5GW로 전망했다. 2년 전 수립한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15~2029년) 당시 잡았던 113.2GW보다 12.7GW 감소했다. 새로 지어지는 원전 APR-1400 모델의 설비 규모가 1.4GW인 것을 감안하면 이번 계획으로 원전 9기 분량의 발전소를 짓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정부는 최대 전력 실적이 늘 예측치를 밑돌았다는 점에서 수요를 하향 조정했다.
그러나 학계는 계획안에서 누락된 2016년 최대 전력 실적이 85.2GW로, 예측치인 84.6GW를 넘어섰다고 했다. 실적도 인위적인 수요 관리에 따라 최대치를 낮춘 것이라고 봤다. 정부는 전력 수요가 몰리는 지난 여름 두 차례(7월 12일, 7월 21일)에 이어 12월 두 차례 등 4차례나 일선 기업에 전기 사용량을 줄이라는 급전(急電) 지시를 내렸다.
학계는 정부가 최대 전력 수요 하향 조정의 근거로 든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최근의 경제 회복 추세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경제성장률 전망치가 7차 때보다 1%포인트 낮아져 전력 수요를 줄여도 별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7차 계획에서 정부는 연평균 성장률 전망치를 3.4%로 추정했지만 8차에서는 2.4%로 떨어뜨렸다. 학회는 "국회 예산정책처의 전망을 보면 올해부터 2021년까지 연 평균 4.6%의 성장률을 기록할 전망이다"고 했다.
학계는 불확실성에 대비해 정부의 적정 설비 예비율(22%)에 10%의 예비율을 더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설비 예비율은 전력 수요가 최대일 때를 대비해 예비로 남겨두는 발전 설비 비중을 뜻한다.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독일(40%)의 경우, 간헐성이 높은 신재생에너지 특성에 대응하기 위해 예비율을 112%로 설정했다.
송종순 조선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최대전력 사용량을 장기전망할 때는 급격한 기후변동에 대한 불확실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지난해 여름 무더위와 올해 12월 강추위를 고려할 때 검증되지 않은 수요 조절로는 전력대란의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② 전기 요금 인상 요인 미반영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 임기인) 2022년까지 요금 인상 요인이 크지 않다"며 "2030년에도 인상폭이 크지 않아 올해 대비 10.9% 상승해 월평균 720원(4인 가족 기준) 오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학계는 실제 요금 인상요인을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추정치가 나왔다고 지적한다. 발전 비중이 16.9%에서 18.8% 늘어나는 LNG만해도 올 하반기 시작된 유가상승 기조로 인해 발전 단가 상승이 예상된다. 국내에 수입되는 LNG는 국제 유가와 연동되기 때문에 유가가 오르면 동반 상승한다. 8차 계획은 발전 정산가가 역대 최저 수준이었던 올해를 기준으로 했다. 작년 말 기준 시간당 발전 단가는 원전(68원)이 가장 싸고 이어 석탄화력(74원), LNG(101원), 신재생에너지(157원) 순이었다.
원자력학회는 "발전단가가 원전의 두배에 달하는 신재생 에너지 확충에 대한 부담도 결국 소비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③ 온실가스 감축 계획 미달
정부는 8차 계획을 발표하면서 2031년까지 원전, 석탄발전의 합은 15.6%포인트 줄이고 신재생, LNG발전을 15.7%포인트 늘리기로 했다. 정부는 환경 비용에 무게를 둔 이른바 '환경급전' 원칙을 적용해 미세먼지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2030년 목표배출량은 5억3600만t으로, 배출전망치(BAU) 대비 37% 감축하는 게 목표다. 이중 25.7%인 2억1860만t은 국내에서 줄이고, 11.3%인 9600만t은 해외에서 감축한다는 계획이다.
8차 계획대로라면 실효용량 기준으로 무탄소 전원(원자력·신재생)은 올해 25.6GW에서 2030년 29.2GW로 증가하고, 유탄소 전원(석탄·LNG)은 같은기간 73.5GW에서 86.4GW로 늘어난다. 무탄소 전원 증가량이 3.6GW에 불과한 데 비해 유탄소 전원은 LNG 발전 증가로 12.9GW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학계는 오히려 LNG 발전 증가가 필터를 통해 걸러지지 않는 초미세 먼지를 더 많이 발생할 것으로 분석했다. 2015년 국립환경과학원의 연로원별 대기오염물질 배출계수 연구결과에 따르면, LNG의 NOx(질소산화물) 배출량은 595.9g/MWh로, 410.8g/MWh를 기록한 석탄보다 많았다. NOx는 산성비의 원인으로 꼽히는 오염물질이다.
④ 원전 조기 폐쇄 법적 근거 없어
8차 계획에 따르면 신한울 3·4호기, 천지 1·2호기,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원전 2기 등 신규 원전 6기의 건설이 중단된다. 내년 월성 1호기를 시작으로 2030년까지 수명이 완료되는 노후원전 10기(8.5GW)에 대해서도 수명 연장을 하지 않는다. 신고리 5·6호기 등 건설 중인 5기의 원전(7GW)은 계획에 포함됐다. 이에 따라 2030년까지 원전은 18기까지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원자력 학회는 "월성 1호기 조기 폐쇄만 해도 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라며 "삼권분립을 무시한 처사로, 절차상 중대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한울 3호기의 경우 2017년 2월 사업허가를 산업부로부터 받아 1500억원이 이미 투자됐다. 두산중공업을 비롯해 한전 E&C에 제작과 설계 용역이 이미 발주됐다. 학회 관계자는 "정부가 허가를 내준 이후부터는 권리가 사업자로 가는 것이 마땅한데, 정부가 법적 근거 없이 일방적으로 사업을 중단했다"며 "이는 한국수력원자력과 국민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운영허가가 만료되는 원전을 영구정지하겠다는 결정이 세계적인 흐름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원전의 계속운전은 개별 발전소별로 위험요소 규명 및 기술적 보강을 통해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원전 88기가 60년 계속운전 승인을 받아 현재 44기가 40년 넘게 가동 중이다. 미국 도미니언 에너지사는 올해 자사 원전 4기를 80년 계속운전 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⑤ 원전 수출 막혀 공급망 붕괴 우려
학회는 정부가 신규원전을 더 이상 짓지 않더라도 원전수출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발표도 현재 탈원전 정책 아래에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수출 계약이 성사되더라도 원전 건설이 시작되기 전까지 설계 등 5년 이상이 소요된다. 그 공백기간 동안 원전 설비 공급망이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학회 관계자는 "2023년부터 원전이 하나 둘씩 폐쇄되는 상황에 맞춰 중소기업들이 연구 개발이나 부품 공급을 더 이상 안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학계에서도 탈원전 정책에 따른 한국 원전 공급망 붕괴를 우려하고 있다. 리처드 뮬러(Richard Muller) 미국 버클리대 교수는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한국 원전은 안정성이 미국과 같거나 더 좋은데도 불구하고 제조 비용이 절반에 불과하다"며 "이런 경쟁력은 1970년대부터 25기의 원전을 지어오며 기술력을 축적한 한국 서플라이체인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