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망 중립성(net neutrality) 원칙을 폐기했다. 망 중립성은 인터넷 통신망을 공공재로 간주해 통신 사업자(인터넷서비스 제공 회사)가 인터넷 회사의 통신망 이용료나 네트워크 속도 등에 차별을 두면 안 된다는 원칙이다.

망 중립성 원칙 폐기가 발효되면 통신 업체들은 인터넷·콘텐츠 기업의 특정 서비스에 비용을 더 많이 부과하거나 각 회사의 인터넷 서비스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돈을 적게 내는 회사의 데이터 처리와 트래픽 속도를 늦추고 돈을 더 많이 내는 회사의 속도를 올려주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 인터넷·콘텐츠 기업과 시민단체들이 망 중립성 원칙 폐기에 반발하는 가운데, 국내 통신·인터넷 업계와 정부도 미국의 망 중립성 폐기에 따른 영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 FCC, 망 중립성 원칙 폐기…인터넷 업체 즉각 반발

FCC는 14일(현지시각) 전체회의 표결을 통해 찬성 3표, 반대 2표로 망 중립성 원칙 폐기안을 통과시켰다. 아지트 파이 FCC 위원장과 공화당 위원 2명이 찬성표를 던졌다.

파이 위원장은 미국 이동통신사 버라이즌의 임원 출신으로, 위원장 취임 전부터 망 중립성 원칙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올 초 그를 FCC 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2015년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만든 망 중립성 원칙 폐기를 추진해왔다.

파이 위원장은 이날 표결에 앞서 “망 중립성 원칙이 폐기되면 AT&T와 컴캐스트와 같은 통신사가 소비자에게 더 다양한 서비스 선택권을 주게 되기 때문에 소비자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아지트 파이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 위원장이 2017년 12월 14일 워싱턴DC에서 망 중립성 원칙 폐기에 대한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망 중립성 원칙 폐기로 AT&T, 컴캐스트, 버라이즌 등 통신 기업들은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 인터넷·콘텐츠 기업들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통신 사업자들은 인터넷·콘텐츠 회사들이 대용량 동영상 등을 서비스하며 막대한 돈을 벌지만, 통신망을 설치하고 유지하는 통신 업체들은 정당한 망 사용 대가를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통신 업체들은 인터넷망 설비에 투자하고 늘어나는 데이터 양을 관리하려면 망 중립성 원칙은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페이스북, 아마존, 넷플릭스, 마이크로소프트 등 인터넷·콘텐츠 업체들은 FCC의 결정을 즉각 비판했다. 이들은 망 중립성 원칙이 없어지면 인터넷 산업의 성장과 혁신이 흔들릴 것이라 주장한다.

넷플릭스는 FCC의 표결 결과 공개 후 “넷플릭스는 FCC의 잘못된 결정에 반대한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베르너 보겔 아마존 최고기술책임자는 트위터 계정에 “망 중립성 보호를 폐지한 FCC의 결정에 매우 실망했으며 개방적이고 공정한 인터넷을 만들 방법을 계속 찾을 것”이라고 썼다.

셰릴 샌드버그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인터넷 (통신망) 제공업체들은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무엇을 볼 지 결정하거나 특정 웹사이트에 더 많은 비용을 청구해서는 안 된다”며 “누구나 인터넷을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쓸 수 있도록 의회 구성원 등과 협력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 통신사들은 FCC의 결정을 내심 크게 환영하면서도 인터넷의 개방적인 환경을 여전히 지지한다는 수준의 입장을 내놨다. FCC 표결 직후 AT&T는 “우리는 웹사이트를 차단하거나 온라인 콘텐츠를 검열하지도 않고 인터넷 트래픽 처리에 불공정한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밝혔다. 버라이즌의 한 임원도 “‘오픈 인터넷’을 전적으로 지지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망 중립성 원칙 폐기에 항의하는 단체가 2017년 12월 14일 미국 워싱턴DC의 연방통신위원회(FCC) 건물 앞에 ‘#RIPinternet(인터넷은 죽었다는 의미)’이라고 적힌 사인을 세워둔 모습.

◆ 정부 “국내 영향 거의 없다”…국내 통신사 “망 중립성 완화 필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미국의 망 중립성 정책 변화가 국내 통신 정책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본다. 한국에서는 법에 인터넷서비스 제공 회사가 기간통신사업자로 분류돼 있어 망 중립성 원칙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대선 당시 “네트워크 접속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확립하겠다”며 망 중립성 원칙 지지 입장에 섰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미국과 우리나라는 망 중립성과 관련한 법이나 가이드라인이 기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미국의 망 중립성 원칙 폐기로 국내 가이드라인이나 정책 방향이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다만, 미국과 유럽 등의 상황과 변화 가능성을 계속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SK텔레콤·KT·LG유플러스 등 국내 통신사들은 망 중립성 원칙이 완화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들은 데이터 이용량이 폭증하는 만큼 인터넷 업체들이 망 투자·유지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G(5세대 이동통신), 블록체인, 사물인터넷 등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상황에서 데이터를 많이 쓰는 인터넷 회사들도 사용량에 따른 비용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 일부도 망 중립성 원칙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최근 “망 중립성 원칙은 5G 시대로 바뀌는 상황에서는 과거지향적”이라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