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2017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가 열린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 한 켠에 자리한 BMW 전시관. 무대 중앙에 일반적인 자동차와 사뭇 다른 느낌의 기묘한 차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유리창과 차체 뼈대만으로 구성된 외관. 실내도 스티어링휠과 각종 계기판을 없애고 좌석만 배치한 파격적인 디자인. 이 차는 인텔과 BMW, 모빌아이가 손잡고 개발한 완전 자율주행 콘셉트카 ‘i 인사이드퓨처’였다.

탑승자가 운전대 없는 차 안에서 자유롭게 업무를 보거나 인터넷을 즐기고 주행 중 잠까지 잘 수 있는 i 인사이드퓨처가 구현할 미래 완전 자율주행의 모습이 상영되자 관람객들 사이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브라이언 크러재니치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i 인사이드퓨처는 3사가 협업 중인 완전 자율주행차의 미래를 대변하는 모델”이라며 “이 콘셉트카를 기반으로 설계 중인 ‘아이넥스트(iNEXT)’를 2021년부터 상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텔이 BMW, 모빌아이와 협업해 완성한 완전 자율주행 콘셉트카 ‘i 인사이드퓨처’(왼쪽)와 엔비디아가 아우디와 손잡고 개발한 자율주행차(오른쪽)

비슷한 시각 LVCC 외곽에 위치한 노스홀에 설치된 간이 트랙 위로는 엔비디아의 차량용 인공지능(AI) 칩을 탑재한 아우디 Q7 차량이 쉴새없이 달리고 있었다. 운전자를 태우지 않은 이 자율주행차는 장애물과 과속방지턱, 직선과 곡선주로 등으로 구성된 트랙 위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매끄럽게 주행했다. 직선주로에서 한껏 속도를 높이다 곡선주로에서는 스스로 속도를 줄였고 어둠이 깔린 야간주행 환경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장애물을 발견한 순간 즉시 비상등을 켜면서 주행을 멈췄다.

인텔과 BMW가 콘셉트카를 선보이며 자율주행차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이 엔비디아와 아우디 진영은 무인차의 시범주행과 시승행사를 열면서 이미 자율주행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증명했다. 한 술 더 떠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 자율주행차의 상용화 목표 시기를 인텔·BMW 진영보다 1년 빠른 2020년으로 제시했다.

올해 초 CES에서 벌어진 인텔 진영과 엔비디아 진영의 ‘기싸움’은 이후 벌어질 양 측의 뜨거운 경쟁을 예고하는 서곡(序曲)에 불과했다. 자율주행차 기술개발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면서 자율주행차의 ‘두뇌’인 데이터처리장치 기술을 선점하기 위해 세계 1위 중앙처리장치(CPU) 기업인 인텔과 그래픽처리장치(GPU) 분야의 1인자인 엔비디아의 자존심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완성차업체들과 부품업체들도 양 측으로 나뉘면서 자연스럽게 자율주행차 경쟁은 ‘인텔 연합군’과 ‘엔비디아 연합군’으로 재편되고 있다.

◆ 엔비디아, 초당 320조회 연산 '페가수스' 공개완전 자율주행 '한 걸음 더'

차가 스스로 주행하기 위해서는 지형지물을 빈틈없이 파악하는 눈과 각종 상황에서 어떻게 대응할 지를 판단하는 두뇌가 필요하다. 카메라와 각종 센서가 자율주행차의 눈 역할을 한다면, 이를 통해 수집하는 방대한 정보를 축적해 분석하고 상황에 맞게 주행하도록 명령하는 두뇌의 역할은 데이터처리장치가 담당한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2017 CES’에서 차량용 인공지능(AI)의 가동원리와 완전 자율주행차의 기능에 대해 프레젠테이션하고 있다.

현재 자율주행차 데이터처리 기술에서 가장 앞선 곳은 엔비디아다. 전통적으로 컴퓨터의 두뇌 역할을 해 왔던 CPU는 자율주행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분석하는데 한계를 보였다. CPU가 감당하지 못하는 빅데이터의 처리 문제를 엔비디아는 주력제품인 GPU로 해결했다.

엔비디아가 지난 1999년 출시한 GPU는 본래 컴퓨터 게임을 위해 개발한 3차원 그래픽 연산용 고성능 칩이다. CPU보다 훨씬 많은 연산 처리를 할 수 있는 GPU가 등장하면서 컴퓨터 게임의 그래픽 사양은 눈에 띄게 개선됐다.

GPU의 개발은 몇 년 뒤 인공지능 분야로 확장됐다. 인공지능의 ‘딥러닝’은 컴퓨터가 인간의 두뇌처럼 방대한 양의 정보를 축적하고 반복 학습해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기술이다. 엔비디아는 GPU가 가진 빅데이터 처리능력을 활용해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췄고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자율주행차 사업에 뛰어들었다.

완벽한 자율주행을 위해 차량에 탑재할 인공지능을 갈망했던 완성차 업체들은 앞다퉈 엔비디아와 손을 잡았다. 전기차 제조사인 테슬라를 비롯해 폴크스바겐과 메르세데스-벤츠, 포드, 볼보 등이 엔비디아와 자율주행차 개발을 위한 협업 관계를 구축했다. 세계 1위 자동차 부품업체로 자율주행에 필요한 각종 센서와 부품을 생산하는 보쉬까지 가세하면서 엔비디아 진영은 데이터처리장치-완성차 하드웨어-센서·부품 분야로 이뤄진 ‘3각 동맹’을 구축했다.

지난달 엔비디아가 공개한 인공지능시스템 ‘드라이브 PX 페가수스’

최근 엔비디아 동맹의 자율주행 기술은 한 단계 더 큰 발전을 이뤘다. 기존 데이터처리장치에 비해 성능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고성능 자율주행 플랫폼을 개발하면서 완전 자율주행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이다.

지난달 10일(현지시각) 엔비디아와 보쉬는 독일 뮌헨에서 열린 ‘엔비디아 GPU 기술 컨퍼런스(GTC) 유럽’에서 사람의 손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레벨5 수준의 완전 자율주행을 위한 인공지능시스템인 ‘드라이브 PX 페가수스’를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드라이브 PX 페가수스는 이전 모델인 ‘드라이브 PX 2’에 비해 10배 이상 많은 초당 320조회의 연산이 가능한 제품이다. 크기는 자동차 번호판 정도로 작아 자율주행차의 에너지 소모량도 크게 감축할 수 있다.

고태봉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페가수스의 개발은 운전자의 개입이 전혀 필요없는 완전 자율주행차의 상용화가 더욱 가까워진 것을 의미한다”며 “엔비디아는 인텔과의 자율주행칩 경쟁에서 또다시 앞서나가게 됐다”고 말했다.

◆ 인텔, 모빌아이 품고 구글과 맞손…공격적 M&A로 엔비디아 ‘맹추격’

엔비디아를 잡으려는 인텔의 추격도 매섭다. 오랜 기간 CPU를 앞세워 전세계 컴퓨터 내장칩 시장을 주도해 온 인텔은 완성차 업체와 기술협약을 맺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최근 공격적인 인수합병(M&A)를 통해 부족한 자율주행 관련기술을 메우는데 사활을 걸고 있다.

인텔은 지난해 사물인터넷(IoT) 보안솔루션과 자율주행시스템을 개발하는 이탈리아의 요기테크와 머신러닝 기술을 보유한 미국 너바나시스템즈를 인수했다. 올해 초에는 첨단 고정밀지도업체인 히어(HERE)의 지분도 15% 사들이며 자율주행에 필요한 위치기반서비스 시장에도 발을 들였다.

지난 3월 인텔은 BMW와 함께 자율주행차 개발을 위해 손을 잡았던 이스라엘의 센서·부품 제조사인 모빌아이를 153억달러(약 17조원)에 인수했다. 모빌아이는 도로 위의 차량과 장애물, 보행자 등 각종 주행상황을 확인해 운전자에게 전달하는 센서를 제조한다. 특히 기존 레이저보다 전방의 물체와 상황을 훨씬 정밀하게 인식하는 장치인 ‘라이다(LiDAR)’와 ‘첨단 운전자보조시스템(ADAS)’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단순한 협업 관계를 넘어 자율주행에 필요한 첨단 센서를 만드는 모빌아이의 경영권까지 손에 쥐었다는 점은 인텔이 데이터처리장치 등에만 머물지 않고 자율주행차 시장 전체를 주도하겠다는 야심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된다.

브라이언 크러재니치 인텔 CEO. 인텔은 모빌아이 인수에 이어 구글 웨이모와도 기술제휴 협약을 맺고 자율주행차 기술개발 속도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엔비디아에 비해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빅데이터 연산 처리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투자와 협력도 확대하고 있다. 인텔은 지난 6일(현지시각) 오랜 기간 CPU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해 왔던 미국 AMD의 GPU를 탑재한 8세대 프로세서인 ‘코어H’를 공개했다. 그동안 부족한 빅데이터 연산능력을 메우기 위해 라이선스 비용을 내고 엔비디아의 GPU 기술을 사용했던 인텔은 지난 3월 엔비디아와 계약이 끝난 이후 AMD와 새로운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를 두고 엔비디아와 자율주행차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인텔이 엔비디아의 GPU와 인공지능 딥러닝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AMD를 새로운 파트너로 선택했다고 해석했다. 인텔은 지난 9일에는 AMD의 그래픽 부문 담당으로 GPU 개발을 진두지휘해 온 라자 코두리를 수석 부사장으로 영입하며 GPU 기술 확보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인텔은 지난해 7월부터 BMW와 손잡고 자율주행차 개발을 진행 중이다. 여기에 지난 8월 피아트크라이슬러(FCA)도 가세했다. 올들어 인텔 진영은 자동차 부품업체인 델파이와 콘티넨탈 등과도 협업 관계를 구축했다. 인텔 진영도 데이터처리-완성차-부품의 3각축을 구성해 엔비디아 진영과의 맞대결에 나선 것이다. 지난 9월에는 구글의 자율주행차 자회사인 웨이모와도 기술제휴 협약을 발표했다.

◆ 엇갈린 韓·日…도요타는 엔비디아 진영 가세, 현대차는 인텔 진영 ‘눈짓’

한국과 일본 완성차 업체들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이미 엔비디아와 인텔의 인공지능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완전 자율주행차의 상용화 시점도 가까워졌다. 이 때문에 시급히 어느 한 쪽과 손잡고 완전 자율주행차 개발에 필요한 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면 자칫 2020년 이후 전개될 새로운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일본의 자동차와 부품, 전장업체들은 그동안 자국 기업들로 동맹을 구성해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을 진행해 왔다. 지난해 도요타와 혼다, 닛산 등 6개 일본 완성차 업체들은 2020년 완전 자율주행차의 일반도로 주행을 목표로 고정밀지도와 차량통신기술, IT 보안 등 8개 분야에서 공동연구를 진행하기로 했다. 여기에 파나소닉과 덴소, 르네사스테크놀러지 등 전장과 부품 분야 6개 업체도 가세했다. 일본 업체들로만 구성된 동맹이 이뤄진 데는 몇 년 뒤 출현할 거대한 자율주행차 시장을 자국의 몫으로 확보하려는 일본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엔비디아, 인텔 진영과의 기술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일본 자율주행차 동맹은 와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완전 자율주행을 위해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할 빅데이터 처리와 인공지능 분야에서 경쟁력이 눈에 띄게 뒤처지자, 일부 업체들이 황급히 새로운 동맹을 찾아나선 것이다. 일본 동맹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왔던 도요타는 지난 5월 미국에서 열린 ‘GTC 2017’에 참가해 엔비디아와의 기술 제휴를 공식 발표했다.

지난달 한국을 방문해 기자간담회를 가진 암논 샤슈아 모빌아이 CEO. 최근 현대차는 모빌아이와 자주 접촉을 갖고 있지만 아직 자율주행차 관련 구체적인 협업계획은 발표되지 않았다.

주요 경쟁사인 도요타가 엔비디아 진영에 가세하면서 아직 아무런 진영에도 참여하지 않은 현대자동차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현대차는 그동안 자율주행차 기술 개발에서 협업 대신 자체 개발에 주력해 왔다. SK텔레콤 등 통신사와 미국 시스코, 중국 바이두 등과 지난해부터 미래 신기술 개발을 위한 파트너십을 맺고 공동 연구를 진행했지만, 이는 주로 커넥티드카와 관련된 협약이었고 인공지능과 GPU 등 핵심기술에 대한 동맹은 아직 찾지 않은 상태다.

최근 현대차가 모빌아이와 부쩍 자주 접촉하면서 자동차 업계 일각에서는 인텔과 모빌아이 진영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지난 5월 이스라엘의 모빌아이 본사를 방문했고 지난달에는 암논 샤슈아 모빌아이 CEO가 현대차를 찾아 경영진과 회동을 갖기도 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올해 엔비디아의 드라이브 PX 페가수스 개발을 기점으로 내년에는 완전 자율주행차의 기술 수준이 눈에 띄게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며 “현대차도 시급히 기술 동맹에 편입해 완전 자율주행에 필요한 인공지능 기술을 확보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