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한국 경쟁법 집행 문제 제기
퀄컴 사건 FTA협정 미이행 불만
협상 지렛대 될까, 핵심 의제 될까

지난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 미국은 경쟁법을 집행할 때 기업들의 증거제출권과 반론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동의명령제(공정거래법 위반 기업이 자진 시정안을 제출해 사건을 종결하는 제도)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미국은 '재벌에 대한 별도의 경쟁법 적용 규정'을 FTA 협정문에 넣어달라고 요구했고, 한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한국 시장에서 자국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으로 이런 조항을 요구했다고 분석했다.

10년이 지나 한미 FTA개정 협상이 추진되자 미국은 또 다시 한국의 경쟁법 집행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미국이 경쟁법 집행의 문제를 제기하는 건 FTA협정 미이행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면서 다른 의제들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협상용’으로 쓰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10년 전처럼 자국 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무리한 요구를 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상황이다.

사진=연합뉴스

◆ 공정위 퀄컴 1조 과징금 “한국 경쟁법 집행 FTA협정 미이행”

14일 산업통상자원부, 공정거래위원회 등에 따르면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8월 열린 한미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에서 공정위의 경쟁법 집행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측이 문제를 제기한 배경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해 미국의 대표 반도체 기업인 퀄컴에 1조300억원의 과징금과 시정명령을 내린 사건이 있다. 공정위는 퀄컴이 지난 2009년부터 7년간 표준 필수 특허를 독점하고 휴대폰 제조업체와 불공정한 라이선스 계약을 했다고 판단했다. 퀄컴은 공정위의 제재에 반발하고 있다. 퀄컴은 지난 2월 서울 고등법원에 불복 소송을 낸 상태다.

해당 문제가 결국 한미간 통상 문제로 비화될 거라는 추측도 많았다. 제이컵스 퀄컴 회장은 지난 7월 미국 워싱턴 미국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한·미 비즈니스 서밋'에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공정위 제재가 공정하지 않다는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 “美, 경쟁법 집행 체계 차이 이해안해”

미국과 퀼컴 측이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은 FTA 협정문의 16장이다. 지난 2007년 미국과 한국은 한미FTA 협상에서 양국은 경쟁법을 집행할 때 국적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당국간 협력을 강화하며, 심판 과정에서 증거제출권이나 반론권 등을 충분히 보장하자고 합의했다. 경쟁법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공정한 경쟁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회사의 독점적인 행위 등 불공정한 행동이나 반경쟁행위를 규제하는 법이다.

미국과 퀄컴 측은 공정위가 퀄컴의 증거제출권과 반론권을 충분히 보장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FTA협정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은 재판이나 심사 개시 전 원·피고 양측이 혐의 입증과 관련된 모든 증거 자료를 공개하고 그 범위 내에서만 본안 심사를 하는 디스커버리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 공정위가 이러한 기회를 보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론의 기회도 충분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미국과 퀄컴이 한국과 미국 기관의 법 집행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경쟁법을 담당하는 한국 공정위와 미국의 법무부 독점금지국(Antitrust Division) 및 연방거래위원회(FTC)는 담당하는 역할에 차이가 있다. 한국의 공정위는 행정부로 행정 제재인 시정 명령과 과징금 등을 부과할 수 있으며, 추가로 형사 조치를 위해 검찰에 고발할 수 있는 ‘전속고발권’을 갖고 있다. 반면 미국의 FTC는 행정 제재로 중지 명령 권한이 있으며, 민사 소송에 대해 원고가 되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원고 적격’을 갖고 있다. 한국 공정위는 민사 소송에 대해 원고가 될 수 있는 ‘원고 적격’ 권한은 없다. 미국은 경쟁법 관련 형사 사건은 법무부 독점금지국에서 처리한다.

한국과 미국의 경쟁법 집행 기관의 역할의 차이에 따라 ‘디스커버리 제도’도 다르게 운영될 수 밖에 없다. 한국 공정위는 행정부이기 때문에 사건에 대해 직권조사(법원을 비롯한 관련 기관이 자진해서 조사해 적당한 조치를 취하는 것)를 할 수 있다. 또 미국은 디스커버리 제도를 민사 사건에서 사용하고, 형사 사건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민사 사건을 다루지 않고 형사 사건에 대해 고발권이 있는 공정위 입장에서는 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해 사용하는 건 사실상 쉽지 않다.

아울러 공정위는 퀄컴 조사에서 ‘영업비밀 보호’를 제외한 대부분의 자료를 공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정위 관계자는 “미국도 형사 사건에서는 디스커버리 제도를 이용하지 않는다”라며 “영업 비밀 보호에 해당하는 자료 외에는 모두 공개했는데, 미국이 한국과 미국의 경쟁법 집행 체계가 다른 점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미국과 퀄컴 측에서 주장하는 반론권 미흡에 대해서도 공정위는 “한국의 다른 사건에 비해 충분히 많은 반론권을 보장했다”라고 반박하고 있다.

공정거래법 전문가인 이준길 법무법인 지평 고문은 “한국 공정위는 행정 제재와 검찰 고발권을 갖고 있고, 미국 FTC는 중지 명령과 민사 사건 원고 적격 권한을, 미국의 법무부 독점금지국은 형사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라며 “경쟁법 집행 기관의 역할이 다른데, 미국이 억지 주장을 하는 측면이 있다”라고 밝혔다.

◆ 경쟁법 협상 지렛대 될까, 핵심 의제 될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이 양 국가의 경쟁법 체제의 차이점을 알고서도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위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이 FTA개정 협상의 다른 의제들을 위해 ‘경쟁법’을 지렛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산업부 관계자는 “해당 문제는 한미FTA개정 협상 때문에 갑자기 튀어나온 사안이 아니다”라며 “그동안 거론됐던 FTA협정 미이행에 대한 불만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공정위 관계자도 “한미 FTA개정 협상을 앞두고 미국 측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을 모두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과정일 수도 있다”라고 밝혔다.

다만 보호무역주의를 추구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조에 따라 미국이 이번 FTA 개정 협상에서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해 무리한 요구를 내놓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미국은 지난 2007년 한미FTA협상에서 '재벌에 대한 별도의 경쟁법 적용 규정'을 요구한 바 있다. FTA협정문에 `한국은 경쟁제한행위에 대한 경쟁법상 금지들이 재벌들에게 적용되도록 보장하여야한다`는 재벌 관련 각주 규정을 요구한 것이다. 당시 한국은 자국의 재벌에 대해 이미 엄정한 법 적용이 되고 있기 때문에 따로 명문화할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지난 2007년 관련 규정을 요구한 데에는 전략적 판단이 깔려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국 재벌들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 시장에서 자국 기업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노림수라는 것이다. 미국이 이번에도 퀄컴 사건을 빌미로 재벌 규제에 대한 문제를 FTA개정 협상 테이블에 올릴 가능성은 있는 이유다.

공정위 관계자는 “아직까지 지난 2007년 재벌 관련 규정 등 FTA개정 협상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라며 “그렇게까지 협상이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선을 그었다. 산업부 관계자는 “미국이 자국 이익 극대화를 위해 경쟁법 카드를 꺼낼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만큼 모든 가능성을 열고 대비하겠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