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공공기관의 채용 비리를 일제히 점검하고 취업 준비생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기 위해 블라인드 채용(Blind·학력, 경력 등 선입견을 가질 수 있는 요소를 빼고 심사하는 방식)을 확대하는 가운데, 일부 대기업은 '동등한 조건일 때 직원 자녀를 우대하거나 우선 채용한다'는 특혜성 조항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원 자녀 우선 채용'은 고용 세습으로 현대판 음서제(고려·조선시대 때 상류층 자손은 과거 시험을 보지 않고 채용하는 제도)로 불린다. 고용노동부는 단체협약에 조합원 가족을 특별·우선 채용하는 내용이 있는 기업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리고 있지만, 주로 노동조합이 반발해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 일부 대기업, 법 위반 소지에도 특혜채용 유지
9일 재계에 따르면 주요 대기업 중에서는 현대차(005380)와 기아차,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GS칼텍스, 현대제철(004020)등이 직원 자녀를 우대하거나 우선 채용하는 내용의 단체협약을 유지하고 있다.
고용부가 지난 2015년에 매출액 상위 30대 대기업의 단체협약 실태를 조사했을 때는 SK이노베이션, 현대오일뱅크, LG화학(051910), SK하이닉스(000660)등도 조합원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내용이 단체협약에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폐지했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신규 채용 시 업무상 사망한 조합원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조항이 단체협약에 있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은 신규 채용 시 같은 조건이라면 종업원 자녀를 우선적으로 뽑는다는 조항을 20년 넘게 유지 중이다. 현대중공업은 이 조항을 1994년에, 대우조선해양은 1996년에 만들었다.
GS칼텍스는 조합원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내용을 2015년에 삭제했지만, 업무상 재해로 순직 또는 퇴사하는 경우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조항은 남겨뒀다. 현대제철은 '같은 조건일 때 질병, 부상, 정년퇴직자의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내용이 단체협약에 담겨있다.
재계에서는 대기업의 직원 자녀 우선채용 단협 조항이 고용정책기본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본다. 기본법 7조는 '사업주는 근로자를 모집·채용할 때에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신앙, 연령, 신체조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학력, 출신학교, 혼인·임신 또는 병력(病歷) 등을 이유로 차별을 하여서는 아니 되며, 균등한 취업기회를 보장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 6개 기업 평균 연봉 8622만원…"부의 대물림"
직원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내용의 단체협약을 맺은 6개 대기업 직원의 작년 평균 임금은 8622만원에 달한다. 기업별 직원 임금은 GS칼텍스가 1억1313만원으로 가장 많았고 기아차(9600만원), 현대차(9400만원), 현대제철(8700만원), 현대중공업(6718만원), 대우조선해양(6000만원) 순이었다.
6개 대기업 직원의 평균 임금은 우리나라 전체 정규직 근로자가 작년에 받은 평균 임금 3354만원의 2.5배 수준이다. 1800만원 안팎인 비정규직 근로자의 임금과 비교하면 약 5배 많다. 이 때문에 대기업이 직원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것은 사회 계층 간 이동을 막고 부(富)를 대물림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들이 이 조항을 유지하는 이유는 대부분 노조원들이 반발하면서 협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도 작년에 이 조항을 삭제하려고 했지만, 노조가 반발해 무산됐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조항을 삭제하자고 노조 측에 요구했는데,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대우조선해양 관계자는 "고용부 시정명령도 받았기 때문에 사측은 올해도 조항 삭제를 요청했고 현재 노조도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기업은 "직원 자녀를 우선 채용한다는 조항으로 입사한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면서도 실제 몇명이 입사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이 조항에 따라 지금까지 몇 명이 입사했는지는 밝히기 어렵다. 회사에서도 기밀 사항"이라고 했다. 다른 기업들도 비슷한 입장이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직원 자녀를 우선 채용하라는 것은 노조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것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청년들이 공평한 취업 기회를 얻도록 세습 규정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