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2000대 기업 중 미국의 순수 소프트웨어 기업은 마이크로소프트·오라클·어도비 등 18개였다. 이 기업들이 지난해 올린 매출은 1926억달러(약 218조원)로 세계 소프트웨어 시장(3330억달러)의 반 이상(58%)을 차지했다. 유럽에는 SAP(독일)·아마데우스IT(스페인)·다쏘시스템(프랑스)같이 각 나라를 대표하는 소프트웨어 기업이 있지만, 한국은 단 한 곳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IT 강국이라고 하지만 삼성전자·LG전자와 같은 제조업체(하드웨어 분야)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것이다. 네이버가 일본 메신저 시장에서 라인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이것도 순수 소프트웨어가 아닌 인터넷 서비스 분야다. 이우일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진정한 IT 강국이 되려면 소프트웨어 분야가 강해야 하지만 한국은 소프트웨어·서비스 분야에서 세계 시장에 명함조차 내밀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스마트폰 빼면 껍데기뿐인 한국 IT 산업

비(非)제조IT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과 국내 기업의 격차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벌어져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소프트웨어 기업인 한글과컴퓨터가 지난해 올린 매출은 1012억원이었다. 세계 1위 소프트웨어 기업인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의 지난해 매출(853억달러·약 96조5000억원)의 0.1% 수준이다.

한국 IT 산업의 현주소가 잘 드러나지 않았던 것은 삼성전자·LG전자·SK하이닉스 같은 IT 제조업체의 성과가 가져온 '착시(錯視)' 때문이다. 지난 11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한국을 비롯한 35개 회원국의 IT 산업 실태를 조사해 발표한 '디지털 경제 전망 2017'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IT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높았다. 2015년 한국 GDP(국내총생산)의 10.4%가 IT 산업에서 나왔다. 그러나 IT 제조업의 비중이 무려 69.4%에 달했다. 이어 인터넷과 IT 서비스(18.5%), 유무선 통신서비스(12.2%)의 비중이 높았고, 순수 소프트웨어 산업의 비중은 통계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미미했다.

제조업을 뺀 한국의 소프트 IT 산업은 '우물 안 개구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1위 사이버 보안 업체인 SK인포섹이 지난해 올린 매출 2002억원 가운데 해외에서 올린 매출은 20억원(1.0%)에 불과했다. 반면 세계 1위 보안 기업인 미국 시만텍은 지난해 40여 국에서 38억달러(약 4조3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국내 최대의 IT 서비스 업체인 삼성SDS는 매출의 절반 이상(52.8%)을 해외에서 올리지만 대부분(73.8%)이 전 세계에 있는 삼성전자와 그 계열사들을 상대로 하는 사업에서 나온 것이다.

경쟁력 상실해가는 하드웨어 산업

문제는 우리가 앞서 있는 IT 하드웨어 분야서도 중국 등 후발 주자들과 격차가 하루가 다르게 줄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의 2016년 기술 수준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반도체에서만 겨우 2~3년 정도 기술 격차를 유지하고 있을 뿐 디스플레이나 스마트폰 분야는 이미 안심할 수 없는 단계로 들어섰다.

삼성·LG디스플레이가 독점해온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에서도 BOE·차이나스타·CEC판다 등 12개 중국 업체가 올 연말부터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중국 스마트폰 기업들은 중국·인도 등 신흥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29일 시장조사기관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중국 샤오미는 3분기 인도 스마트폰 시장에서 22%의 점유율로 1위 삼성전자(23%)를 턱밑까지 쫓아왔다.

"빅데이터 활용은 그림의 떡"

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 가운데 새롭게 떠오르는 소프트 분야인 클라우드(가상저장공간) 활용 비율은 조사 대상 33국 가운데 21번째, 빅데이터 분석 활용은 21국 가운데 꼴찌였다. 선진국들은 금융·통신·유통·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쏟아져 나오는 빅데이터를 분석해 끊임없이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과도한 개인정보 보호에 막혀 있다. 한국에서 개인 정보가 포함된 빅데이터는 개인신상정보를 삭제하는 '비식별화 조치'를 해도 사실상 활용이 불가능하다. 차재필 인터넷기업협회 정책실장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AI(인공지능)와 클라우드 컴퓨팅을 이용해 빅데이터에서 정보를 뽑아내고 이를 가공해서 활용하는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지만 우리한테는 모두 그림의 떡"이라고 했다.

▲30일자 B1면 '한국은 IT 강국? SW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기사와 관련 그래픽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지난해 매출 '8530억달러·약 965조원'은 '853억달러·약 96조5000억원', 시만텍의 지난해 매출 '380억달러(약 43조원)'는 '38억달러(약 4조3000억원)'이기에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