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다. 벌건 대낮에 저리도 당당하게 집게발을 들고 갯벌로 나서다니.'

미국 서부 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리건 게(Hemigrapsus oregonensis)'는 평소 천적인 '붉은 바위 게(Cancer productus)'를 피해 바위틈에 몸을 숨긴다. 몸길이 3㎝의 작은 회색 몸통은 바위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갯벌에 나서면 언제라도 미리 파놓은 구멍으로 숨을 준비가 돼 있다.

미국 포틀랜드 주립대 연구진은 최근 오리건 게가 붉은 바위 게를 만나도 잘 숨지 않는 현상을 발견했다. 앞서 연구에서 게가 사는 바닷물에서 항우울제 '프로작' 성분이 발견됐다. 사람이 복용한 프로작이 미처 몸에서 분해되지 않고 하수를 통해 바닷가로 흘러든 것이다.

우울증 환자야 프로작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지만 멀쩡한 게는 프로작에 취해 갑자기 세상 모든 게 만만해 보이는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다는 가설이 나왔다.

미국 서부 해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리건 게. 하수를 통해 유입된 항우울제 프로작 성분으로 인해 천적에 대한 겁이 사라져 대낮에도 갯벌을 활보하는 일이 늘었다.
항우울제 프로작

연구진은 검증 실험을 했다. 해안에서 발견되는 농도만큼 프로작 성분을 물에 넣고 오리건 게와 붉은 바위 게를 같이 넣었다. 국제학술지 '생태학과 진화'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예상대로 오리건 게는 낮에도 잘 숨지 않고 천적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료와의 다툼도 늘었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사용한 약물로 인해 수중 생태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고 걱정한다. 지난해 '환경과학기술'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피임약 성분으로 황어 암컷이 수컷처럼 행동하고, 수컷도 짝짓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조사 결과가 실렸다.

반대로 각성제인 암페타민이 수중 생태계로 흘러 들어가 물에 사는 각다귀류가 미친 듯 짝짓기를 해서 개체 수가 89%가 늘었다는 연구 논문도 나왔다. 지난해 '네이처 미생물학'에는 항생제 성분이 바닷물로 퍼져 중국 해안에서 항생제 내성 박테리아가 크게 늘었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됐다. 자연이 나서 도핑 테스트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