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남부에 노이슈반슈타인(Neuschwanstein)이라는 성채가 있다. 동화에나 나올 것같이 멋진 이 성을 지은 이는 바이에른의 국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다. 어린 나이에 재위에 올라 '소년왕'으로 불린 그는 성인이 되어도 꿈꾸는 소년의 삶을 살았다. 그가 매혹된 것이 리하르트 바그너(Wagner·1813~1883)의 오페라였다. 특히 그는 '로엔그린'에 심취했는데, 마치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성안을 이 오페라와 관련된 그림, 장식으로 채웠다.

'로엔그린'의 내용은 이렇다. 지금의 벨기에 땅인 브라반트 공국(公國)을 다스리던 공작이 죽고 딸 엘자와 어린 아들 고트프리트만이 남았다. 어느 날 남매가 강가로 산책을 나갔는데 남동생이 사라졌다. 공국의 계승자가 실종되자, 텔라문트 백작은 동생을 살해한 혐의로 엘자를 황제에게 고소한다. 엘자와 텔라문트의 재판은 결투로 승패를 가리라는 선고가 내려진다. 결투에서 엘자가 이기면 무죄가 되지만, 지면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여성인 엘자는 자신을 대신해 싸워줄 기사를 구해야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속에는 기사·성배·마녀 등 유럽 중세를 대표하는 상징물들이 등장한다. 사진은 엘자가 꿈속에서 만났던 기사 로엔그린이 등장하는 장면.

갈망 끝에 구원자로 나타난 왕자

어떤 기사도 섣불리 엘자를 위해 나서지 않는다. 그래도 엘자는 꿈속에서 보았던 기사, 즉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백조를 타고 와서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환상 같은 소리만 되풀이한다. 사람들은 그녀가 이상해졌다고 수군거린다. 그때 강 저편에서 정말 누군가가 백조를 타고 오는 것이 아닌가? 엘자가 꿈에서 봤다는 기사가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엘자에게 자신을 대신 싸워줄 기사로 받아들이겠냐고 묻는다. 그리고 결투에서 이긴다면 자신을 남편으로 받아들이겠냐고 또 묻는다. 엘자에게 다른 선택이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승낙한다. 그런데 기사는 엘자에게 한 가지 약속을 더 해주어야 한다고 조건을 건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엘자는 약속한다.

결투가 시작되고 기사는 승리한다. 모두가 환호하는 가운데 엘자의 무죄가 입증된다. 역경을 넘어선 엘자와 미지의 기사는 마침내 결혼한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 울려 퍼지는 음악이 바로 신부 입장곡으로 널리 알려진 '결혼행진곡'이다. 실로 감격적인 날이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신방에 든 엘자는 결혼의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 "이렇게 행복한 순간에 당신을 뭐라고 부르죠?"라며 기사의 이름을 묻는다.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약속은 고작 하룻밤을 넘기지 못했다. 낙담한 신랑은 황제와 사람들 앞에 나가 신분을 밝힌다. 그는 성배(聖杯)를 지키는 성배기사단의 일원이자, 파르지팔 왕의 아들 로엔그린이다. 그의 고결한 출신에 사람들이 놀란다. 하지만 그는 "성배의 기사는 신분을 의심받는 순간, 그 힘을 잃어버리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로엔그린은 먼저 고트프리트를 데려와 공국의 후계를 잇게 한다. 실종된 줄 알았던 고트프리트가 사실은 마녀의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로엔그린을 데려왔던 백조가 마법에서 풀려나 고트프리트로변신한다. 로엔그린이 말한다. "무릎을 꿇으시오. 브라반트의 공작이십니다." 엘자는 돌아온 동생과 포옹한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로엔그린은 이미 강을 건너 떠나가고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방패로 얼굴을 가린 채.

왕자를 놓친 것은 성숙함 부족 탓

이 동화 같은 이야기는 유럽에서 전해지는 여러 전설을 바탕으로 바그너가 직접 대본을 쓴 것이다. 기사, 결투, 훈족, 마녀, 성배 등 중세를 상징하는 다양한 소재가 백과사전처럼 펼쳐진다. 마녀 때문에 세상에서 내쳐진 여자는 간절히 구원을 기도하고, 마침내 그 기도는 받아들여져서 구원자가 온다. 그러나 이 오페라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엘자의 구원자는 1막에 이미 등장한다. 그렇다면 '로엔그린'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간절히 기도한다면 기회는 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준비된 성숙함과 역량이다. 많은 사람이 성공의 기회를 얻기 위해 공을 들인다. 하지만 기회가 오더라도 누구나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엘자는 간절한 기도로 원하는 것을 실현했지만, 그녀의 나약함과 의심 때문에 손에 잡았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물론 오페라를 자세히 본 관객이라면 엘자가 마녀의 꾐에 넘어가 실수했다고 옹호할수도 있다. 하지만 마녀가 비집고 들어오는 것도 우리가 틈을 보이기 때문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