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24일 발표한 가계부채 종합대책에서 신규 대출 억제 뿐만 아니라 기존 대출 원금상환 규모를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정부가 24일 발표한 가계부채 종합대책은 중장기적으로 가계의 디레버리징(deleveraging·부채축소)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주택 등 자산 대비 부채 비율은 위험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 절대량이 늘어난 상황에서 부채를 줄이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뒤따르는 소비 위축이다. 원금 상환 속도를 높이면 그만큼 소비여력은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전날 당정협의에서 “그간 정부 대책으로 가계 부채의 질적 구조는 양호한 상황이라 당장 금융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GDP(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규모가 크고 증가 속도도 빨라 선제적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가계부채가 소비, 성장 등 경제 부담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연착륙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24일 발표에서 “연도별 가계부채 증가율을 현재 추세 전망치 대비 0.5~1.0%포인트 낮춰 2005~2014년 연평균 증가율 8.2% 이내가 되도록 점진적으로 유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신규 대출은 신DTI (총부채상환비율) 및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도입으로 억제하고, 기존 대출은 분할 상환 비율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원금 상환 속도를 빠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주택대출 만기 5년 이하 38.5%, 만기일시상환 32.2%…원금 부담 늘 것

문제는 기존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상당수가 만기 시 원금 일시 상환이라는 것이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 자료에 따르면 가계 담보대출 가운데 만기에 한꺼번에 원금을 갚는 만기일시상환 비중은 2016년말 현재 32.2%에 달한다. 원리금 분할과 일부 만기 상환을 혼합한 형태도 17.1%다.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분할상환 비중이 2012년말 13.9%에서 2017년 6월 47.8%로 높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상당수 가계대출, 특히 주택담보대출은 평상시에는 이자만 내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대출은 만기가 돌아오면 새로 대출을 받는 형태로 사실상 만기 연장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만기일시상환 대출은 만기가 짧다. 2016년말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만기 3년 이하는 34.0%, 3~5년은 4.5%인데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만기일시상환형이라는 게 한국은행과 금융권의 시각이다. 주택매매가 잦은 상황에서 대규모 대출을 일으켜 주택을 매입하고, 주택을 팔 때 매매차익으로 대출을 상환하는 방식이 즐겨 사용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대출 가운데 상당수가 원금 상환 조건으로 대출 갱신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지금도 만기일시상환 방식의 기존 주택담보대출들은 만기 연장 시 원리금 분할상환으로 상환방식이 바뀌고 있다”며 “그 속도가 가팔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금융위원회는 올해 분할상환비중을 55.0%로 크게 높이겠단 목표다.

정부는 기존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금액이나 은행 변경 없이 단순 만기연장할 경우 신DTI 기준을 적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것이 만기일시상환 대출의 단순 연장도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게 은행권의 시각이다. “실제 시행 지침을 봐야겠지만, 이미 분할상환 형태로 대출을 전환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 기조가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또 다른 은행 관계자는 말했다.

◆40대 이상 허리띠 다시 조이나

만기일시상환에서 분할상환으로 바뀔 경우 만기일시상환 대출 비율이 높은 40대 이상 장, 노년층은 소비를 줄일 가능성이 크다. 2016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가계 담보대출 가운데 만기일시상환 방식 비중을 연령별로 나눠 보면 20~40대는 10~20%대에 불과했지만 50대는 36.2%, 60대는 42.8%에 달한다. 소득이 적은 장, 노년층이 자산을 매입하면서 원금 상환 부담을 가급적 줄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디레버리징 과정에서 장년층이나 노년층이 소비를 줄이는 현상이 한국에서도 관찰된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신인석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전 자본시장연구원장)은 9월 기자간담회에서 2012년 이후 한국 가계들이 소득 대비 소비를 줄였던 현상에 대해 ‘미니 디레버리징’이 발생한 것 아니냐는 진단을 내놨다. 그는 “한국 주택 가격은 2012~2014년 상당 폭 하락이 있었는데, 여기에 대응해 부채를 줄이는 과정에서 소비가 감소하고 중립금리(완전고용 상태에서 인플레이션을 야기하지 않는 금리 수준)가 내려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디레버리징으로 장년층 소비가 더 줄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가계의 소득 대비 소비 비중인 평균소비성향은 2012년 무렵부터 뚜렷하게 하락하는 데, 연령이 높은 가계일수록 그 하락폭이 크다”는 얘기다. “가계 부채의 연령구조를 보면 주택시장이 침체기에 접어든 2012년말 1억원 이상 거액부채자 가운데 약 80%가 40대 이상”이었다고 신 위원의 분석했다. 실제로 2010년 이후 주택 보유 여부가 가계소비성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시작했다. 40~50대 유주택자는 평균소비성향 하락폭이 4.1~4.2%로 같은 연령대 무주택자의 소비 하락폭(2% 이하)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정부가 디레버리징이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다른 정책 수단을 내놓지 않은 것도 소비 감소 가능성을 높인다. 원만하게 디레버리징 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먼저 가계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부동산)을 금융회사, 기업 또는 정부가 매입해 ‘질서 있는 후퇴’를 돕는 것이다. 부동산 부채를 줄이고, 가격 폭락에 따른 일본형의 ‘대차대조표 불황(금융 부채는 그대로인데 자산 가치가 떨어져 빚을 상환하기 위해 소비 및 투자를 줄여 나타난 불황)’을 막기 위해 자산과 부채를 정부 및 민간에 이전하는 방식이다.

두 번째는 적극적인 재정 투입과 구조 개혁을 통한 소득 증가다. 소득 증가율이 가계부채 증가율을 앞지르면 그만큼 부채의 상대적 규모는 줄어든다. 세 번째는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 등을 용인해 금융 자산의 실질 가치를 끌어내리는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적인 방법이다. 정부의 가계 부채 대책엔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떤 것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3월 기자간담회에서 “부채 절대 규모를 줄이는 것은 경제에 충격을 주는 것인데, 현재 미약한 경제 회복세를 감안하면 그런 충격을 감내할 수 있을 지 걱정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하반기 들어 한은은 경제가 견실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하지만 정부의 이번 가계부채 대책이 경제에 상당한 충격을 줄 가능성은 크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