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일 로저스 등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학생 4명은 세계 최초의 무인 전자동 레스토랑 '스파이스 키친(Spyce Kitchen)'으로 지난해 4월 전미 발명 경진 대회 '레멜슨-MIT'상 대학생 부문을 수상했다. 스파이스 키친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이나 기계에 달린 터치스크린을 누르면 로봇 셰프가 고기·야채 등 식재료를 가공해 5분 내에 완성된 요리를 선보인다. 현재 MIT 케임브리지 캠퍼스 학생 식당에서 코코넛 카레 등 5가지 메뉴를 제공하고 있으며, 보스턴 지역 대학으로 서비스를 확대할 계획이다. 미국 경제 전문 매체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사람의 노동력 없이 값싼 가격으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조할 수 있다면 패스트푸드 산업에 혁명을 몰고 올 것"이라고 했다. 스파이스 키친 같은 학내 창업에 힘입어 MIT 동문(재학생·졸업생) 100명당 창업 기업 수는 1970년대 6.9개에서 2010년대 18개(추정치)로 2배 가까이가 늘었다. 전 세계 3만개 이상의 MIT 동문 창업 기업이 창출한 경제적 가치(매출+연관 일자리 창출)는 1.9조달러. 2016년 명목 국내총생산(GDP) 세계 8위인 이탈리아(1조8507억달러)보다도 크다.

글로벌 이공계 대학이 미래 기술 혁신을 주도하는 '창업 사관학교'로 진화하고 있다. 일본 교토대 출신 고마 히로야스는 일본의 테슬라로 불리는 전기차 회사 GLM을 창업했다(왼쪽 위). 실시간 채팅 소프트웨어 회사 조핌의 공동 창업자들은 싱가포르국립대 해외 인턴십 프로그램에서 만났다(왼쪽 아래). 미국 MIT 학생 4명은 세계 최초의 무인 전자동 레스토랑 '스파이스 키친'을 MIT 케임브리지 캠퍼스 학생 식당에 선보였다(오른쪽).

일본 교토대 학내 벤처로 출발한 GLM은 일본의 '테슬라'로 불리는 전기자동차 회사다. 교토대 출신 고마 히로야스(小間裕康) 창업자와 도요타·닛산 출신 엔지니어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GLM은 오는 2019년 4인승 전기차 G4를 출시해 아시아·중동 전기차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G4는 한 번 충전으로 400㎞를 달릴 수 있고 최대 출력이 540마력에 달한다.

MIT, 조지아공대, 칭화대, 취리히연방공대, 싱가포르국립대, 교토대 등 글로벌 이공계 대학이 로봇, 인공지능, 전기자동차, 헬스케어 등 미래 기술 혁신을 주도하는 '창업 사관학교'로 거듭나고 있다. 교과서 속 낡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산업계가 요구하는 기술·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인큐베이터'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프랭크 루레디 영국 켄트대 교수(사회학)는 "(세상을 바꿀 기술을 보유한) 대학생들이 창업한 스타트업(신생 벤처)은 전통 비즈니스(대기업)보다 더욱 빠르게 기술 혁신을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칭화대는 지난해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의 유명 벤처 투자자인 피터 틸 페이팔 공동 창업자 등을 강사로 초청해 1학점짜리 '스타트업 싱킹(Start-Up Thinking)'이라는 과목을 진행했다. 그는 중국 시장의 사례를 들면서 성공하는 기업과 기술의 미래를 제시했다. 이와 함께 칭화대는 지난 2013년 창업 플랫폼 'X-랩'을 만들었다. 경제경영은 물론 14학부가 참여해 워크숍, 경진 대회를 통해 학생들의 기업가 정신을 독려하고 있다. 성공 가능성이 높은 기술·아이디어는 투자자, 멘토와 연결해준다. 마오덩휘(毛東輝) 칭화대 X-랩 센터장은 "칭화대 학생의 연구 결과는 때론 실리콘밸리 기업을 능가할 때도 있다"며 "학생들이 초기 단계의 사업 또는 제품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조지아공대는 '혁신 기술 사업화하기(TI:GER)' 프로그램을 운영해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사업화하고 실제 제품 출시 단계까지 지원한다. 지난 2015년 TI:GER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은 덴마크 코펜하겐비즈니스스쿨과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글로벌 협업 능력을 키웠다.

싱가포르국립대는 창업가를 양성하기 위해 6~12개월짜리 해외 스타트업 인턴십 프로그램(NUS Overseas College\NOC)을 운영 중이다. 전 세계 창업의 요람으로 불리는 미국 실리콘밸리·뉴욕, 스웨덴 스톡홀름, 중국 베이징·상하이, 독일 뮌헨 등에 연간 200명이 넘는 학생을 파견하고 있다. 해당 도시의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것은 물론 해외 명문 대학의 수업을 듣는다.

지난 2007년 설립된 실시간 채팅 소프트웨어 솔루션 회사 조핌(Zopim)의 공동 창업자들은 싱가포르국립대의 NOC에서 만났다. 이들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유명 투자자인 팀 드레이퍼 DFJ 회장으로부터 조언을 받았고, 이후 제품을 사업화하는 데 성공했다. 조핌은 월간 사용자가 2억9000만명에 달하는 성과를 냈으며, 지난 2014년 3000만달러를 받고 미국 소프트웨어 기업 젠데스크에 매각됐다.

스위스 취리히연방공대는 지난해 10월 취리히 인근 클로텐에서 25국, 56팀이 참여한 가운데 '사이배슬론(CYBATHLON)'이라는 세계 최초의 사이보그(신체 일부를 로봇으로 대신한 사람) 올림픽을 열었다. 사이배슬론은 장애인 선수가 로봇의 도움을 받아 하는 컴퓨터 자동차 게임, 전기 자극을 가해 다리를 움직이며 하는 자전거 경주, 로봇의족 달리기 등 6가지 종목에 참여해 실력을 겨루는 대회다. 로버트 리너 취리히연방공대 교수가 장애인의 활동을 돕는 로봇 기술 개발·사업화를 위해 고안했다. 서강대 공경철 교수(기계공학)가 이끄는 연구팀은 사이배슬론 대회에서 보행 보조용 웨어러블 로봇 '워크온(WalkOn)'으로 3위에 입상했고, 지난 3월 LG전자와 웨어러블 로봇 개발을 위한 기술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사업화를 준비 중이다.

미국 코넬대는 이스라엘 테크니온공대와 손을 잡고 이번 달 미국 뉴욕시 맨해튼 동쪽의 작은 섬 루스벨트(Roosevelt)아일랜드에 '코넬테크'라는 공학 대학원을 열었다. 첫해 교수 30명, 학생 300명으로 출발한 소수 정예 캠퍼스는 창업에 강한 엔지니어 양성을 목표로 세웠다. 헬스테크(의료 분야 최신 기술)와 커넥티브 미디어(미디어에 최신 IT 네트워크 기술 접합) 등 최신 융합형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코넬테크가 뉴욕시의 미래 경제를 만들어 나갈 것이며, (창업의 요람인) 제2의 실리콘밸리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1년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에 들어선 스콜코보(Skolkovo) 과학기술대는 러시아 정부가 지원하는 스콜코보 재단과 미국 MIT가 협력해 만들어졌다. 이 학교는 정보 기술(IT), 에너지, 바이오, 핵, 우주 등 러시아가 선정한 5가지 전략 분야를 연구하는데, 1400개 이상의 스타트업(2015년 연매출 10억달러 돌파)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한다.

강성모 UC샌타크루즈 석좌교수(전기공학)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전 세계적으로 창업의 메카인 이공계 대학의 역할이 급속히 커지고 있다"고 밝혔다. 강 교수는 최근 WEEKLY BIZ와 가진 인터뷰에서 "반도체 칩 연산 능력과 알고리즘(소프트웨어)의 고도화로 인공지능(AI) 기술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면서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클라우드 같은 기술 변화 흐름 속에서 대학 내 연구실(학생·교수 등)이 파괴적 혁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경우 대량생산으로 제품 가격을 낮추는 전략을 취하기 때문에 혁신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지만, 대학 연구실에서는 순수 연구에 몰두하기 때문에 혁신 기술이 나올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지적했다.

강성모 UC샌타크루즈 석좌교수.

강 교수는 "(미 캘리포니아 서부 해변에 있는) UC샌타크루즈가 바이오 연구를 선도하면서 인간의 유전체 정보 분석 연구가 활발해지고 캠퍼스 인근에 스타트업(신생 벤처)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면서 "전 세계 유명 이공계 대학 인근에 새로운 산업 생태계가 조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이공계 대학이 강점을 살려 창업 허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정부가 대학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철저히 성과에 기반한 연구 지원 정책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교과서 속 지식만으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창업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데 부족하다"고 분석했다.

"미국 이공계 대학은 학생·교수와 기업의 공동 프로젝트를 장려하며, 창업에 성공한 동문들이 멘토링·투자에 나서 산업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강 교수는 한국이 벤치마킹할 모델로 싱가포르·이스라엘을 들었다. 그는 "싱가포르는 이공계 분야의 재정적 지원은 물론 보상도 상당해 (연구 실적이 뛰어난) 외국인들도 많이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스라엘은 이공계 대학생들이 브레인 스토밍(자유 토론)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실제 사업화에 성공시키는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한국에서도 캠퍼스 내 창업을 활성화하는 문화·교육 체계가 갖춰질 때 미국·유럽·이스라엘처럼 성공 사례가 많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공계 대학이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디어·열정을 꽃피우는 터전이 될 때 비로소 창업사관학교라는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