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65) 삼성전자(005930)부회장이 13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전격적으로 선언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권 부회장은 현재 삼성전자 DS(디바이스 솔루션) 부문장과 이사회 의장, 삼성디스플레이 대표이사직을 맡고 있다. 임기가 끝나는 내년 3월 중순에 이들 자리에서 모두 물러날 예정이다. 권 부회장은 이재용 부회장 구속과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였던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사실상 삼성그룹을 대표해 왔다.

지금까지 삼성그룹에서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지 않은 고위 임원이 스스로 물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권 부회장은 사퇴 이유를 설명하면서 “회사가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어 비상한 각오로 경영을 쇄신할 때”라고 말했다. 권 부회장이 “후진을 위해 퇴진”하기로 하면서 삼성그룹 내부에 경영 쇄신을 위한 세대교체 바람이 불지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권오현(왼쪽) 삼성전자 부회장이 6월 23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공정거래위원회-4대그룹 정책간담회에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모두발언을 듣고 있다.

◆ 삼성전자 윤부근·신종균 부문장 거취도 관심

권 부회장은 이날 삼성전자 임직원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IT 산업의 속성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이 바로 후배 경영진이 나서 경영을 쇄신해 새 출발할 때”라며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IT산업은 소비자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어 민첩하게 대응해야 하는데, 본인보다는 후배 경영진이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경영전반을 총괄하는 이재용 부회장을 중심으로 권오현 부회장, 윤부근 CE(소비자가전) 부문장(사장), 신종균 IM(IT·모바일) 부문장(사장)이 삼각 편대를 구축해 이끌어왔다. 권 부회장 뿐 아니라 윤 사장과 신 사장도 모두 60대로 이들의 임기는 2019년 3월까지다. 삼성 안팎에서는 윤 사장과 신 사장도 임기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물러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전문경영인 3인 중에서는 권 부회장이 9월말 기준으로 대표이사로 67개월을 근무했으며 윤 부문장과 신 부문장의 경우 각각 55개월이다. 이들 외에 삼성의 주요 전자 계열사 CEO 중에서 나이가 60세 이상인 사람은 정유성(61) 삼성SDS대표가 유일하다.

삼성 관계자는 “회사가 최고의 실적을 기록하는 중에 임원이 스스로 그만둔 경우는 거의 없어 내부에서도 이례적으로 보고 있다”며 “윤 부문장과 신 부문장의 거취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 삼성 내부에 ‘경영 쇄신’ 분위기 퍼질까

재계 일각에서는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상황도 권 부회장이 사퇴한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권 부회장은 이 부회장이 재판을 받는 동안 삼성그룹을 대표해 여러 공식적인 자리에 참석했는데, 이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을 크게 느꼈을 것이란 시각이다.

또 이 부회장을 대신해 스마트폰, 반도체에 이은 삼성전자의 새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권 부회장은 임직원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지금 회사는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다. 다행히 최고의 실적을 내고는 있지만 이는 과거에 이뤄진 결단과 투자의 결실일 뿐, 미래의 흐름을 읽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권 부회장의 사퇴로 삼성 내부에 ‘경영 쇄신’ 분위기가 퍼질지도 관심이다. 삼성은 작년 하반기에 이 부회장 재판이 시작되면서 정상적인 경영 활동을 사실상 못하고 있다. 인사 및 조직개편이 늦어지면서 내부 활력이 떨어졌고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미래전략실이 해체돼 인수합병 등 주요 의사결정도 늦어지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조직이 정체된 느낌이어서 답답함을 느끼는 직원들이 많다”며 “권 부회장도 이런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용퇴한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권 부회장은 임직원에 보낸 메시지에서 “저의 사퇴가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한 차원 더 높은 도전과 혁신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권 부회장이 조직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사퇴를 선언했지만, 다른 계열사 CEO들의 일괄적인 동반 사퇴는 없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과거에는 미래전략실이 계열사 임원 인사를 총괄했지만, 해체 이후엔 각 계열사 이사회가 자율적으로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또 권 부회장의 사퇴는 이재용 부회장이 조직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단행한 게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삼성 관계자는 “미래전략실이 해체되면서 각 계열사는 이사회를 통해 자체적으로 CEO와 임원들을 교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