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잔은 포도 품종이나 산지, 와인의 종류에 따라 마시는 잔이 다 다르다. 같은 프랑스라 하더라도 피노누아를 주품종으로 한 부르고뉴산 와인 잔은 풍선처럼 가운데가 볼록한 반면, 카베르네쇼비뇽이 주품종인 보르도산 와인의 경우 부푼 정도가 덜하고 튤립 모양에 가까운 잔에 마신다.

화이트 와인용 잔은 보통 레드와인에 비해 크기가 작고 달걀모양을 하고 있다. 샴페인 잔은 와인 속에 용해되어 있는 기포가 위로 잘 올라 올 수 있도록 몸통이 좁고 긴 것이 특징이다. 이 모두 와인의 독특한 향과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것이다.

커피도 와인과 같이 커피의 종류와 특성에 따라 사용하는 잔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커피에 사용되는 잔 중 가장 작은 잔은 에스프레소 잔이다. 에스프레소는 아주 적은 양의 농축된 진한 커피추출액이다. 에스프레소는 공기에 노출되자마자 그 맛과 향이 빨리 변화된다. 따라서 에스프레소는 추출한 뒤 30~40초 내에 바로 음용하거나 베리에이션 음료(에스프레소와 우유 등을 이용하여 만드는 각종 커피 메뉴)의 재료로써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래서 초창기 이탈리아의 카페는 주문을 받자마자 에스프레소를 추출하여 최대 1분 안에 손님에게 내주고 15~20초 이내에 후루룩 마실 수 있도록 스탠드바 형식이었다. 테이블로 에스프레소를 나르는 시간을 줄여 스탠드바에서 바로 에스프레소를 마셔 에스프레소의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우리 주위에는 이와 같은 스탠드바 형식의 카페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테이블형식의 카페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에스프레소 메뉴는 더욱 신경을 써야할 음료가 되었다.

에스프레소를 담는 잔의 종류는 유리로 만든 샷그라스(Shot glass)와 자기로 만든 데미타세(Demitasse)가 있다. 그 크기와 모양은 작고 앙증맞다.

에스프레소로 추출되는 양이 적기 때문에 에스프레소 용 잔의 크기 역시 아주 작은 편이다. 샷그라스는 미리리터(ml)와 온즈(oz) 단위로 눈금이 그어져 있어서 액량을 측량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데미타세는 60~90ml 크기가 일반적인데 그것보다 조금 더 큰 90~120 ml의 세미 데미타세(Semi demitasse)도 있다. 세미 데미타세는 에스프레소 샷의 양을 105ml까지 추출하여 강렬한 커피맛(일명, '룽고')을 즐길 때 주로 사용되는 잔이다.

에스프레소 잔은 모양이 아주 중요하다. 겉모습 보다 내부 모양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에스프레소 잔의 내부는 완벽한 달걀 곡선 형태로 만든다. 그 이유는 에스프레소의 농도와 크레마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내부가 달걀처럼 생긴 둥근 잔에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면 둥근 바닥 중심으로 원액이 모여 섞이면서 서서히 커피액이 차오르게 된다. 이 때 크레마는 잔의 둥근 바닥 중심에서부터 천천히 걷히면서 표면 위로 올라오고 일정한 두께를 형성한다. 최종적으로 크레마는 잔의 둥근 곡선과 조화를 이루며 유지가 된다.

에스프레소 잔의 내부면 모양.

에스프레소 한 잔의 용량은 약 25~35ml로 아주 적다. 그래서 만약 잔 내부의 선이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면 추출이 시작되자마자 추출액이 평평한 바닥에 넓게 퍼져 바로 식을 수 있다.

그러나 잔 내부의 선이 둥근 곡선을 이루고 있다면 추출이 끝날 때까지 둥근 바닥으로 추출액이 모여 섞이고 온도를 유지하면서 차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커피의 향과 맛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커피 잔의 바닥면에 따른 추출 현상의 차이.

또한 에스프레소 잔은 두께가 아주 두껍다. 에스프레소의 양이 매우 적기 때문에 커피 온기와 크레마 상태를 잃지 않고 손님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두께를 두껍게 하는 것이다.

76도~85도의 고온으로 추출되는 에스프레소의 온도는 향미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추출시의 온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미리 잔을 예열해 두었다가 사용한다.

최근에는 에스프레소 잔의 겉모습에 미술작가의 예술작품을 담아서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폭이 좁고 높은 잔을 만들거나 깔때기모양의 고깔 형태 등 다양한 모양의 잔이 선보이기도 한다.

에스프레소 잔의 또 다른 비밀은 바로 손잡이에 있다. 에스프레소 잔의 손잡이는 손가락을 끼우기에는 아주 작은 편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엄지와 검지의 두 손가락만으로 꽉 잡을 수 있도록 손잡이를 디자인 한다고 한다.

에스프레소잔의 손잡이

에스프레소 잔의 또 다른 특징은 보통의 도자기와는 달리 특수 장석 자기로 만들어져 아주 견고하다는 점이다. 고령토와 석영이 들어있어 내열에 강하고 특수 장석이 들어있어 아주 단단하다. 항상 뜨거운 음료를 담아야 하고 몇 번씩이나 씻으며 반복해서 사용해야 하므로 모서리가 쉽게 부서지거나 깨지면 안되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 잔 외에도 커피를 담는 잔으로는 모닝컵과 머그잔이 있다. 모닝컵의 용량은 일반적으로 180ml이다. 주로 드립커피나 카푸치노를 담을 때 주로 사용한다. 머그는 통상 용량이 300ml를 넘는다. 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담을 때 사용된다.

모닝컵은 윗면의 지름이 넓은 것도 있고 좁은 것도 있는데, 잔의 모양에 따라 느껴지는 맛이 달라진다. 윗면의 지름이 넓은 잔은 신맛이 두드러진 커피에 좋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킬 때 음료가 입 안 가득 전체로 퍼져나가 혀 좌우까지 신맛을 한 번에 느끼게 해주기에 좋기 때문이다.

반대로 윗면의 지름이 좁고 높이가 높은 잔은 쓴맛이 나는 커피에 좋다. 커피를 마실 때 음료가 입안에 일직선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혀 안쪽에서 잘 느껴지는 쓴맛을 느끼기에 좋다.

또한 잔의 재질로서 음용하는 커피의 온도를 달리 느낄 수 있다. 일반적인 도자기 잔은 온도를 유지하기 좋아 따뜻한 커피에 좋으며 잔의 끝이 혀끝에 닿았을 때 부드럽게 느껴지는 장점이 있다.

반면, 스테인레스 잔은 차가운 느낌을 주나 세련되고 심플한 이미지와 모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스테인레스 잔은 휴대하기 쉬어 외부활동시 사용하면 좋고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유리잔은 투명하여 깨끗해 보이나 깨지기 쉽고 밋밋해 보일 수도 있다. 유리잔은 커피의 느낌을 전달하기 용이하므로 연하고 마일드한 커피를 담는데 좋다.

커피잔을 관리할 때는 부드러운 스펀지를 이용하여 세척하고 말리거나 행주로 닦아서 보관해야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다. 카페에서 컵을 보관할 때 에스프레소 머신 위(워머)에서 잔을 보관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데 머신 위에 잔을 똑바로 세워서 보관하면 컵 속으로 이물질이 들어갈 우려가 있으나 입술이 닿게 되는 컵의 가장자리는 청결하게 관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잔을 엎어서 보관하면 이물질은 들어갈 수는 없지만 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입에 닿는 가장자리가 청결해지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꼭 주의해야 한다.

음료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커피잔을 선택하는 것은 커피를 제대로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다. 부드러운 카페라떼는 윗면이 넓은 모닝컵에 마셔보고, 아메리카노는 머그잔에 마셔보자. 강볶음 커피의 쓴 맛을 좋아하면 윗면이 좁고 높이가 높은 잔에 마셔보자. 커피잔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지를 느껴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