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연초 딸과 함께 해외 여행을 가기로 했다. 딸과의 첫 여행이라는 설레임도 잠시. 출국에 앞서 여행자보험에 가입한 A씨가 흥분한 건 보험사의 태도 때문이다. A씨는 승인이 났지만 초등학생 딸은 거절당한 것이다. "장애가 있기 때문에 여행자보험에 가입할 수 없습니다." 딸이 선천성 장애를 갖고 태어나 거동이 불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딸은 휠체어를 타긴 했으나 밝고 건강한 아이다. 다른 아픈곳도 없었다.
여행자보험은 말 그대로 여행 중 불의의 사고나 질병, 휴대품 도난, 배상책임 손해 등을 보상해 주는 보험이다. 불과 나흘 남짓한 여행기간동안 있을지 모를 도난 등에 대비하고자 한 것인데,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입을 거절당하니 A씨는 눈물이 나왔다.
한 번이 아니다.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A씨는 본인이 가입한 생명·실손·상해보험 등 모든 보험사에 연락해 봤으나 장애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딸의 보험 가입을 받아주지 않았다. 일반인에겐 제발 좀 가입해 달라고 사정하면서 장애인은 아예 인수심사도 하지 않는 것인가. A씨는 서러웠다. 보험사에 대한 신뢰는 더 약해졌다.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둘러싸고 지역사회 갈등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교육 뿐만 아니라 보험에서도 장애인 소외현상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장애인전용 보험이 개발되기는 했으나 보장이 적어 유명무실한데다 일반보험은 가입 자체가 거절된다. 정부의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삼성·한화·교보생명은 곰두리 보장보험을 판매 중이다. 이 상품은 장애인만 가입할 수 있는 전용보험 상품으로 지난해 약 600건만 판매됐다. 보험 가입을 위해선 장애인 등록증을 통해 장애인임을 증명해야 한다.
판매실적이 부진한 건 내는 보험료에 비해 보장내용이 부실해서다. 암과 사망만 보장하는데다 보장금액도 적다.
예컨대 교보생명이 판매하는 곰두리보험은 40세 여성이 20년만기 상품(주계약 보험가입금액 500만원)에 가입하면 매달 2만2550원씩을 내야 한다.
이 상품은 가입 후 암으로 진단이 확정되면 400만원을 지급한다. 이후 유방암과 전립선암을 제외한 암에 또 걸렸다면 600만원을 지급한다. 두번 모두 최초 1회에 한해서기 때문에 두번의 암이 걸렸을때 받을 수 있는 최대 보장금액은 1000만원인 셈이다.
또 피부암·제자리암·대장점막내암·경계성종양·갑상선암으로 진단받으면 100만원만 지급받는다. 20년동안 낸 보험료는 총 544만8000원인데 반해 보장받을 수 있는 금액은 1000만원 수준에 그친다. 상품이 매력적이지 않아 장애인이 가입할 유인이 적은 것이다.
장애인 전용 연금보험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 상품은 연금수령액을 높인 상품으로 비장애인에 비해 10~15%정도 연금수령액이 높다. 동부화재, NH농협생명, KDB생명 정도가 판매하는데 실적은 미미하다. 사업비가 낮아 설계사들이 보험 판매에 적극적이지 않아서다.
보험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장애인들이다. 장애인의 1인당 진료비 부담은 전체 인구 1인당 진료비 부담보다 3.9배 높다. 장애인은 소득도 일반인에 비해 낮아 추가적인 질병에 걸렸을때 이를 대비할 능력이 떨어진다.
2014년 기준 장애인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223만 5000원으로 전국 가구 평균(415만2000원)의 53.8%수준에 불과했다.
문제는 법에서 장애인 차별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데도, 이를 지키는 보험사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보험업법 97조는 보험계약 체결이나 모집할때 정당한 이유가 없이 장애인의 보험가입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인권위도 2014년 장애를 이유로 보험상담이나 심사 자체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가이드라인이 원칙만을 제시할 뿐 보험사들이 장애인의 인수심사를 적극적으로 하도록 유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장애인의 보험가입 거절이나 보험조건 제약이 대부분 인수심사 단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인수심사는 보험사의 재량이다.
금융위는 일단 전동휠체어 같은 전동보장구 관련 보험상품부터 개발할 계획이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이달초 장애인단체와 만나 "장애인이 금융상품을 가입할 때 부당하게 거절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내년부터 금융소비자보호 실태평가 항목에 이같은 내용을 넣어 보험사가 가이드라인을 지키는지 점검한다.
전문가들은 이보다 더 실효성 있는 정책을 위해선 정부가 더욱 적극적인 지원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장애인 공제회 등을 통해 정부가 생명·실손·상해보험 등 일부 예산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복지가 개선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보험개발원을 통한 장애인 사고통계 구축도 필요하다. 보험사들은 장애인의 위험통계가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아 위험요율 산정이 어렵다며 난색을 표해왔다.
금융위 관계자는 "금융소비자보호법에 장애인 차별금지 근거를 마련해 이번 정기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며 "금융회사 내 장애인 차별금지 내규를 도입하고 장애인 보험차별 가이드라인을 지키도록 유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