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폐기를 준비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 자동차 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지난 2012년 한·미 FTA가 발효된 이후 자동차 산업은 대표적인 수혜업종으로 꼽혀왔다.
특히 대미(對美) 자동차 수출에서 약 70%의 비중을 차지하는 현대·기아차의 고민이 깊다. 현대·기아차는 지난 3월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이후 중국 시장의 판매 부진이 장기화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미국 시장에서도 판매량이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의 주문대로 한·미 FTA가 폐기 수순을 밟거나 재협상을 통해 그동안 누렸던 수출관세 철폐 혜택이 사라질 경우 현대·기아차는 가격 경쟁력 약화로 더 큰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 현대·기아차, 올들어 美 판매량 11% 감소…점유율도 하락세
4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올들어 8월까지 미국 시장에서 현대·기아차의 자동차 판매량은 96만3622대로 전년동기대비 10.7% 감소했다. 현대차는 12.7% 감소한 52만1078대, 기아차는 8.4% 줄어든 44만2544대를 판매하는데 그쳤다.
올들어 8월까지 미국 전체 자동차 판매대수는 전년동기대비 2.8% 줄었다. 전체 시장과 비교했을 때 현대·기아차의 판매 부진은 심각한 수준이다. 같은 기간 도요타의 판매량은 1.3% 감소했고 포드(-4%)와 혼다(-0.5%), 폴크스바겐(5.5%) 등 다른 경쟁사들도 현대·기아차에 비해 양호한 판매실적을 보였다.
하반기 들어 현대·기아차의 미국 시장 판매 부진은 심화되고 있다. 지난달 현대·기아차의 판매량은 12만6263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8% 감소했다. 특히 현대차의 판매량은 7만2015대로 24.6% 급감했다.
시장 점유율도 지속적으로 하락세다. 지난 1월 4.1%를 기록했던 현대차의 미국 시장내 점유율은 지난달 3.7%까지 떨어졌다. 기아차의 점유율도 7월 4%에서 8월에는 3.6%로 하락했다.
현대·기아차는 일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제외한 대부분의 차종에서 판매대수가 크게 감소하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지난달 미국 시장에서 쏘나타의 판매량은 27% 감소했고 아반떼와 싼타페도 각각 23.2%, 24.4% 줄었다. 기아차도 스포티지(-12.7%)와 K5(-25.3%) 등 주력 모델의 판매가 두자릿수의 감소율을 보였다.
◆ FTA 양허 정지시 추가 손실 불가피…수출 비중 큰 기아차 타격 더 클 듯
자동차 업계에서는 만약 한·미 FTA의 재협상 또는 폐기로 국내 자동차 산업이 얻은 수출관세(종전 2.5%) 철폐 효과가 사라질 경우 현대·기아차는 가격 경쟁력 약화로 수익성이 악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지난해 전체 대미 자동차 수출대수는 96만4000대였다. 현대·기아차는 약 70%에 해당하는 66만6000대를 수출했다.
자동차 산업은 그동안 한·미 FTA의 발효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업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산업연구원이 한·미 FTA 발효 이전인 2007년부터 2011년까지 5년간의 대미 수출액 평균과 발효 이후인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의 수출액 평균을 비교한 결과 자동차 산업의 대미 수출 증가 규모는 91억7700만달러를 기록해 일반기계(23억2900만달러), 철강(17억2100만달러) 등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이 때문에 한·미 FTA가 폐기 수순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자동차 산업의 관세율은 조정될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해 말 한국경제연구원은 '한·미 FTA 재협상론과 한국 산업에 대한 경제적 영향분석' 보고서에서 한·미 FTA 양허가 정지되면 자동차 산업의 총 손실액이 2021년까지 133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만약 한·미 FTA가 폐기되거나 자동차 부문의 관세가 부활할 경우 현대차보다 기아차가 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현대차가 전체 미국 판매차량의 절반 이상을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는 반면 기아차는 여전히 국내 생산차량의 수출 비중이 높아 FTA에 따른 가격 영향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현대차의 경우 지난해 기준 전체 미국 시장 판매에서 현지 생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54%, 국내 생산 차량의 수출 비중은 46%였다. 기아차는 수출 비중이 66%인 반면 멕시코 공장을 포함한 현지 생산 비중은 34% 수준에 머물렀다.
◆ "관세 인하 효과, 크지 않아"…FTA 재협상 영향 미미할 것이라는 분석도
일각에서는 FTA의 재협상이나 폐기가 현대·기아차의 미국 판매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은 크지만, 판매대수가 지금보다 큰 폭으로 감소하거나 손실이 눈에 띄게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FTA 발효 이후 현대·기아차의 미국 판매량이 늘어난 것은 미국의 경기회복으로 전체 수입이 증가한 것일 뿐, FTA 이후 관세 철폐가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미미했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산 자동차에 부과되는 2.5%의 관세는 한·미 FTA가 발효된 2012년 이후 2015년까지 유지되다 지난해 철폐됐다. 현대차의 대미 수출량은 2011년 27만8000대에서 2012년 35만3000대, 2013년 33만3000대, 2014년 35만2000대, 2015년 36만8000대로 꾸준히 증가하다 지난해 33만5000대를 기록했다. 관세가 유지된 기간에 미국 수출이 늘었지만, 관세가 철폐된 후 오히려 감소세로 돌아선 것이다.
김바우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2012년 이후 미국에서 한국산 자동차의 수입이 크게 증가한 것은 결국 FTA 발효에 따른 관세 인하와는 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며 "한국 자동차 업체들의 대미 수출이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은 기업의 경영전략 변화나 미국의 전체 수입 증가 등 경기 요인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