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22일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개정 협상을 공식 요청했다. 우리 정부는 일단 미국 개정 협상 제안에 대해 "수용할 수 없다"고 뜻을 전했지만 전문가들은 사실상 개정 협상이 막을 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와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이날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미 FTA 특별 공동위원회를 열었다. USTR는 2011년 한·미 FTA 발효 이후 5년간 미국의 대(對)한국 무역 적자가 2배 증가한 점을 거론하며 조속한 시일 안에 FTA 개정 협상을 개시하자고 요청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한·미 FTA를 두고 "끔찍한 협정"이라고 부르면서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밝히기는 했지만 미 정부가 개정 협상을 공식 요청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측은 자동차·철강·정보통신(IT) 분야에서 양국 간 무역 불균형이 심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향후 일정을 포함한 어떤 합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며 "FTA 개정 필요성 등에 이견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우리 협상단은 한·미 FTA는 미국 무역 적자 원인이 아니고, 양국 간 이익 균형이 잘 이뤄져 있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양국 전문가들이 함께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와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 원인에 대해 조사·분석·평가하자고 미국 측에 제안했다.

이날 회의를 계기로 한·미 FTA 개정을 둘러싼 힘겨루기가 장기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우리가 동의하지 않으면 개정 협상은 진행되지 않는다. 다만 최악의 경우, 미국이 FTA 폐기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한·미 FTA는 효력이 정지된다.

영상회의로 시작 - 산업통상자원부와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22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 회기를 열었다. 양국 수석 대표인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USTR 대표가 TV 모니터를 통해 영상회의 하는 모습을 양국 대표단이 경청하고 있다.

양측은 이날 오전 8시부터 8시간 넘게 기싸움을 벌였다. 이날 회의는 USTR이 지난 7월 12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대표 명의로 서한을 보내 "특별 공동위를 열어 한·미 FTA의 개정 및 수정 가능성을 포함한 협정 운영 상황을 검토하자"고 제안한 지 42일 만에 열렸다. 양국은 한·미 FTA 발효 이후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공동위원회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왔지만 어느 한쪽 요청으로 특별회의를 연 것은 처음이다.

정인교 인하대 부총장은 "무역적자 해소를 최우선 국정 순위로 삼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체결한 각종 무역협정이 미국에 손해를 끼친다고 보고 이를 손보겠다는 의지가 강해 우리 정부가 미국 측의 요구를 계속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며 "사실상 개정 협상의 막이 올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한·미 FTA로 미국의 무역 적자가 늘어났다는 미국 측 주장은 오해라는 입장이다. 우리의 대미(對美) 흑자는 2015년 258억달러에서 지난해 233억달러로 줄었고, 올 들어서는 7월 현재 96억달러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36% 줄며 2년 연속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전체 무기 수입액(2015년 기준)의 90%가 넘는 50억달러를 미국산 무기를 사는 데 써온 것까지 감안하면 한국의 실질적인 대미 흑자 폭은 더 줄어든다. 여기에 지난해 대미 서비스수지는 143억달러 적자를 기록했다.

한국의 대미 자동차 수출액은 지난해 기준 155억달러로 한국의 미국차 수입액(17억달러)의 9배다. 미국은 이를 갖고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지만 한·미 FTA 체결 후 미국 자동차의 한국 수입 증가율(37.1%)은 한국차의 미국 수출 증가율(12.4%)보다 3배 가까이 높다. 철강의 경우 FTA 이전의 관세율이 이미 0%대여서 관세 인하와 수출 증가가 큰 상관관계가 없다.

최원목 이화여대 교수는 "미국 트럼프 정부는 내년 중간선거 전에 통상 분야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해 협상을 서두를 가능성이 있다"며 "우리는 안보·북핵 이슈와 맞물려 대미 협상력이 떨어지기 쉬운 만큼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한·미 FTA 개정 논의가 시작되자 재계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자동차와 철강·IT 등 미국이 무역 적자의 주범으로 지목한 기업들은 FTA 개정으로 수출 여건이 더 나빠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다. 특히 자동차는 중국의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보복'과 노조 파업, 통상 임금 판결 등 악재(惡材)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미국 수출길마저 막히는 사태는 최대한 막아야 하는 처지다. 이미 미국으로부터 반덤핑 관세 등 무역 규제 조치를 줄줄이 맞은 철강업계도 수출 여건이 개선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국내 통상 전문가들은 개정 협상에 들어갈 경우, 미국에 요구할 부분은 당당하게 주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안덕근 서울대 교수는 "디지털 무역 등 변화한 무역 환경에 맞춰 FTA를 업그레이드하면 우리한테 나쁠 게 없다"며 "우리가 적자를 보는 서비스 교역과 불공정 논란이 제기됐던 투자자·국가소송제(ISD), 미국의 무역 규제 남용 등 문제를 개선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