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식사자리에서 중국 선사 관계자를 만났는데 한국 정부가 정말 고마웠다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국내 항만‧포워더(운송대행업체)‧수출업계 관계자들이 외국 선사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내용상 비슷한 이야기를 듣는다고 한다. 지난해 8월 한진해운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결정한 한국 정부가 이해는 안 되지만, 강력한 경쟁자를 없애줘서 고맙다는 것이다. 지난해 벼랑 끝까지 몰렸던 글로벌 해운업계는 한진해운 사태 이후 점차 회복되는 추세다.

2016년은 세계 해운업계에서 잊을 수 없는 해다. 2014년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이 등장하면서 선복(적재량) 공급량이 급증했고, 이로 인해 운임이 점점 낮아지더니 비정상적인 수준에 이르면서 사상 최악의 불황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해 상반기 한국에서 남미(브라질 산토스)까지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1TEU)를 옮기는데 드는 비용은 50달러, 유럽은 100달러까지 떨어졌다. 이랬던 해상 운임은 지난 8월 14일 기준으로 상하이발 남미행, 유럽행 기준으로 TEU당 각각 2980달러, 931달러를 기록했다.

바닥을 기어가던 운임 상황이 반전된 것은 한진해운 법정관리 직후다. 특히 물동량이 급증하는 계절적 성수기인 3분기(7~9월)에 한진해운발 물류대란이 터지면서 운임이 급등했다. 지난해 8월 30일 미주 서안 운임은 1FEU(4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당 1153달러에서 한진해운 법정관리 신청 직후인 9월 2일 1746달러로 51% 급등했고, 같은 기간 유럽 운임은 1TEU당 695달러에서 949달러로 36% 올랐다. 과거 해운업 전성기와 비교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의 운임이지만 한진해운 사태는 글로벌 해운사들이 숨통을 트는 전기가 됐다.

한진해운이 사라지면서 해운 불황의 근본 원인이었던 공급 과잉 문제도 일시적으로 해소됐다. 여기에 외국 선사들은 한진해운이 40년간 힘들게 확보해놓은 화주들을 가로채면서 노선 점유율까지 늘렸다. 노선 점유율을 늘리려면 다른 선사로부터 화주를 빼앗아 와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외국 선사들은 한진해운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너무나 손쉽게 점유율을 늘렸다.

머스크라인 컨테이너선박

한숨 돌린 글로벌 선사들은 인수합병(M&A)과 초대형선 발주로 대형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앞으로 해운업계는 선복량이 100만TEU 이상인 7개 선사가 시장을 주도하는 새로운 체제가 자리잡을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선사들이 구상하는 새로운 해운체제에서 한국은 완전히 배제돼 있다. 한진해운 파산으로 한 순간에 해양강국에서 해운 변방국이 된 것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한진해운의 희생 아닌 희생으로 해운업계가 살아났으니 외국 선사들 입장에서는 한국 정부가 고마울 만 하다”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은 쓰리다”고 했다.

◆ 한진해운‧현대상선과 비슷했던 머스크‧MSC, 20년간 1669%‧1953% 성장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규모는 현재 세계 1‧2위 머스크, MSC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한국선주협회에 따르면 1997년 기준으로 한진해운과 현대상선 선복량은 각각 17만TEU, 11만TEU였다. 당시 머스크의 선복량은 23만TEU, MSC의 경우 15만TEU, CMA‧CGM은 9만TEU, COSCO의 경우 20만TEU였다. 국내 선사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수준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7년 상황을 보면 국내 선사와 글로벌 선사간 격차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머스크 선복량은 인수 작업 중인 함부르크 수드를 포함해 407만TEU로 20년 만에 1669% 증가했다. MSC는 308만TEU로 같은 기간 1953%의 증가율을 보였다. CMA‧CGM과 COSCO도 각각 246만TEU, 235만TEU(OOCL 포함)로 2633%, 1075% 늘었다. 반면 국내 해운업계에서는 그 사이 60만TEU를 가지고 있던 한진해운이 사라졌고, 현대상선은 11만TEU에서 36만TEU로 227% 증가하는데 그쳤다.

글로벌 선사들이 국내 선사와 달리 외형을 빠르게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각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했을 뿐 아니라 M&A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머스크는 미국 선사 시랜드, 네덜란드 선사 P&O네들로이드 등을 인수하며 세계 1위 자리를 굳혔다. CMA‧CGM은 프랑스 선사 델마스 인수로 덩치를 키웠다. 중국 국영기업 COSCO도 또 다른 국영기업 CSCL와 합병 이후 ‘빅4’에 합류했다.

한진해운·현대상선도 글로벌 선사들과 발맞춰 선복량을 꾸준히 늘리려고 노력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은 뒤 고(高)용선료에 발목 잡히며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후에는 줄곧 자산 매각 등 자구 노력을 하는데 시간을 빼앗겼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1990년대 후반까지 한진해운‧현대상선도 세계 4위‧8위의 대형 회사였지만, 김대중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회사에 부채비율 200%를 일괄적으로 요구하면서 배를 팔 수밖에 없었다”며 “그러는 사이 외국 선사들이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으로부터 싼 이자로 돈을 빌려 국내 조선소에서 큰 배를 건조하면서 격차가 더 벌어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중국 선사 COSCO 컨테이너선

◆ 글로벌 상위 5개 선사 점유율 27%→71%로 집중현상 심화

선사간 통합 작업은 한진해운 사태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머스크는 독일 선사이자 세계 9위 함부르크 수드 인수 작업을 마무리 중이다. COSCO는 홍콩 선사이자 세계 7위 OOCL 인수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일본 3사 NYK‧MOL‧K라인은 컨테이너 부문 합작 법인 ‘ONE' 설립을 마쳤다.

상위권 선사들의 시장 점유율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27% 수준이었던 상위 5개 선사의 시장 점유율은 올해 상반기 기준 64.3%로 높아졌다. 머스크라인의 분석에 따르면 이 비중은 2018년 이후 71%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머스크라인은 올해 2분기 실적 보고서에서 “컨테이너 산업에서 상위 5개 선사 집중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해운업은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덩치를 키워 운송 단가를 낮추는 ‘규모의 경제’가 중요한 산업이다. 글로벌 해운업계는 머스크, MSC, CMA‧CGM, COSCO, 하팍로이드, 에버그린, ONE 등 100만TEU 이상인 7개 선사를 중심으로 재편될 것으로 보인다. 이외 선사들은 상위 7개 선사에 흡수되거나 퇴출당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현대상선 선복량을 100만TEU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현대상선이 100만TEU가 되려면 덩치를 지금보다 두 배 이상 키워야 한다. 현대상선은 2020년부터 국제연합(UN) 산하 국제해사기구(IMO)가 시행할 예정인 황산화물(SOx) 배출 규제에 발맞춰 친환경 초대형 선박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