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충청북도 음성 원남산업단지. 산자락 아래 늘어선 공장들 사이에 갤러리를 연상케 하는 이질적인 유럽풍 붉은 벽돌 건물이 서 있다. 4미터 높이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대한 양조시설이 눈에 들어온다. 2015년 국내 최초의 크래프트(수제) 병맥주 브랜드 '아크'를 내놓은 국내 대표 수제맥주 생산업체 '코리아 크래프트 브류어리(Korea Craft Brewery, KCB)'의 양조장이다.

병입 시설이 위치한 제2공장의 문을 열자 맥주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서빙고' 맥주병이 병정처럼 줄지어 생산라인을 따라 '척척'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맥주가 가득 찬 병목엔 뽀얀 거품이 올라왔다. KCB 관계자는 "탄산이 병목까지 올라와 있다는 건 맥주 외의 공기가 병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선 시간당 최대 3000병의 맥주를 병입한다.

KCB 양조장 전경.

코리아 크래프트 브류어리의 '아크 허그미' 맥주는 지난해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금상을 받기도 했다. 올해 들어선 지난 6월 '해운대', 8월 '서빙고' 맥주 등을 연달아 출시해 홈플러스에 공급하며 수제 맥주 붐을 이끌고 있다.

해운대 맥주는 지난 7월 수입 맥주가 즐비한 홈플러스의 맥주 판매 순위에서 12위에 올랐다. 캔 맥주인 해운대 출시 이후 KCB맥주의 매출 신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1940% 늘었다. 김홍석 홈플러스 차주류팀 바이어는 "세계 맥주와 국산 대형 주류사의 틈바구니에서 소형 양조업체가 이뤄낸 쾌거"라며 "8월 초 출시한 서빙고 맥주의 판매량도 예상치를 크게 웃돌고 있다"고 전했다.

◆ 엿기름으로 식혜를 만들듯... 맥아가 홉과 효모를 만나 향긋한 수제맥주로 변신

맥주 제조 과정은 엿기름을 띄워 식혜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제분기에서 맥아를 분쇄한다. 지나치게 도정하면 맥주의 풍미를 살릴 수 없기에 낱알을 적당히 빻는 것이 중요하다. KCB는 독일과 덴마크의 맥아를 수입해 사용하고 있다.

정문을 열고 들어서면 보이는 양조 설비의 모습.

제분을 거친 맥아는 당화조(메쉬톤)로 옮겨진다. 뜨거운 물에 도정한 맥아를 넣고 죽처럼 만들어 보리의 당과 단백질을 녹여내는 과정이다. 당화를 끝낸 맥즙은 여과조(라우터)로 옮겨져 보리 껍질 등의 부산물을 걸러낸다.

본격적인 맛 내기는 이제부터다. 맥즙을 '케틀(주전자)'로 옮겨 홉을 투입하고 한시간여 팔팔 끓여낸다. 이 과정에서 맥즙은 맥주 특유의 향과 맛을 얻는다. 김우진 KCB 브류잉 총괄팀장은 "홉은 박테리아를 억제하는 보존료인 동시에 맥주에서 느껴지는 쓴맛과 아로마 향을 좌우한다"며 "맥즙을 끓이면 내부의 당분이 캐러멜화해 독특한 풍미를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끓여낸 맥즙엔 각각의 맥주 레시피에 따라 오렌지, 생강 등 부재료가 더해진다.

케틀을 거친 맥즙은 아직 맥주라 부를 수 없다. 맥즙을 발효해 알코올을 만들어 낼 효모가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효모 투입은 20도 내외로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발효 탱크에서 이뤄진다. 발효를 위해 필요한 기간은 5일에서 7일 정도. 탱크에선 발효 과정에서 만들어진 이산화탄소가 물에 담겨진 파이프를 통해 뿜어져 나온다. 파이프에 코를 대자 향긋한 맥주 향이 느껴졌다. 맥즙이 '맥주'로 변해간다는 증거다.

◆ 바다가 떠오르는 '해운대', 한여름의 시원한 '서빙고'

양조장에 마련된 펍에서 '해운대'와 '서빙고' 맥주를 시음해봤다. 이력서에 취미를 '음주'라 적었던 기자지만, 양조장에서 갓 생산된 맥주를 마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해운대 맥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여행지에서 편히 마실 수 있는 맥주를 콘셉트로 했다. 잔에 코를 대면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향긋한 파인애플 향이 난다. 에일(알코올 도수가 높고 색깔과 맛, 향이 진한 맥주)임에도 라거 맥주를 마신듯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도수가 낮아 여행지에서 낮에 마셔도 부담이 없을 듯 했다. 김 팀장은 "해운대 맥주의 최초 콘셉트를 잡고 두달여간 여러 시제품을 만들었다"며 "최초 제조 과정부터 홈플러스 바이어가 매주 음성 공장을 찾아 마케팅 방안 등을 협의했다"고 말했다.

KCB 양조장 내엔 펍이 준비돼 있어 산지에서 막 만들어진 맥주를 안주와 함께 시음할 수 있다.

서빙고는 벨기에 '트리펠 에일(Tripel Ale)' 스타일을 구현해 묵직한 '바디감'이 특징이다. 국산맥주 중 가장 높은 알코올 함량(8.5%)을 자랑한다. 묵직한 바디감의 배후엔 캐러멜화한 설탕의 달짝지근한 맛이 따라와 높은 도수에도 쉽게 마실 수 있다.

서빙고는 특유의 바디감을 위해 맥아 비율을 높였다. 맥주 4000리터를 생산하는데 1톤가량의 맥아가 투입된다. 김 팀장은 "한국에서 보기 힘든 묵직한 맛의 맥주를 만들고자 했다"며 "한국 소비자들은 도수가 높고 바디감 높은 맥주에 대한 로열티(충성도)가 높은 경향이 있어 호응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곳 양조장에선 브루어리 투어도 진행하고 있다. 김 팀장은 "주로 회사 워크숍이나 가족단위로 양조장을 찾는다"며 "1.9리터 들이 맥주를 구매해가거나 현장에서 결제해 택배로 받아가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 대형마트에 등장한 수제맥주들...마트는 구색 넓히고, 중소업체는 판로 얻는다

국내 수제맥주 시장은 현재 200억원 규모로, 전체 맥주시장의 0.1% 정도지만 최근 3년간 연평균 100%가량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주류업계는 10년 뒤 수제맥주 시장 규모가 2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수제맥주가 유행하면서 2001년 6곳에 불과했던 맥주면허사업자는 지난해 60곳으로 늘어났다.

지난 2일엔 소규모 맥주 면허를 지닌 사업장도 소매점에 맥주를 판매할 수 있게 한 맥주세제개편이 이뤄지며 수제맥주 업계가 날개를 달았다. 그동안 수제맥주 업체들은 일반 맥주 면허로 대형마트에 납품해왔지만, 이번 세제개편으로 소규모 맥주 면허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또 기존 소규모 양조장은 저장조 시설 기준 75kl까지만 적용됐지만, 120kl까지 소규모 면허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됐다. 기존 연간 출고량 100kl 이하에만 부여했던 60%의 주세 경감률 기준도 연간 200kl로 확대됐다.

병입을 마친 서빙고 맥주의 모습.

홈플러스는 일찌감치 소규모 양조장이 생산하는 지역 수제맥주를 판매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홈플러스는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기업인 만찬에 제공돼 '청와대 맥주'로 유명세를 탄 세븐브로이의 '강서맥주'와 '달서맥주'를 지난해부터 판매하고 있다.

홈플러스에 따르면 지난 7월 한달간 강서 맥주와 달서 맥주는 500ml 미만 병맥주 판매순위에서 수입맥주들을 제치고 1위와 3위를 차지했다. '해운대 맥주' 역시 출시 한달만에 세계맥주를 포함한 캔맥주 판매순위에서 10위에 올랐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국산 수제맥주의 선전으로 전체 맥주 매출 중 국산맥주 비중이 55%를 기록, 3개월 만에 수입맥주를 재역전했다"고 밝혔다.

김홍석 홈플러스 차주류팀 바이어는 "수제맥주의 경우 그동안 가정용과 업소용 판매량 비율이 5대5 정도였지만, 최근 대형마트에 입점하며 가정용 판매 비중이 55% 수준으로 올라서게 됐다"며 "마트는 맥주 라인업을 강화하고 중소기업은 판로를 개척하는 상생 사례"라고 말했다. 그는 "맥주를 즐기는 소비자 취향이 다양해지고 있는 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국내 지역 수제맥주 도입을 이어갈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