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韓·美) 과학자들이 인간 배아(수정란)에서 유전병을 일으키는 돌연변이 유전자만 골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진은 질병 유전자가 정상 유전자로 교정된 걸 확인한 뒤 수정란을 폐기했기 때문에 유전자가 바뀐 아기가 실제로 탄생하지는 않았다.

과학계는 수정란 단계에서 돌연변이 유전자를 없앨 수 있음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난치성 질환을 일으키는 유전자의 대물림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길이 열렸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유전병 예방을 넘어 지능이나 외모 관련 유전자를 원하는 대로 바꾸는 이른바 '맞춤형 아기'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서울대 화학부 교수)과 미국 오리건 보건과학대 슈크라트 미탈리포프 교수 공동 연구팀은 "특정 유전자만 잘라낼 수 있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이용해 인간 수정란에서 비대성 심근증의 원인이 되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제거했다"고 국제 학술지 '네이처' 3일 자에 발표했다. 비대성 심근증은 심장의 좌심실 벽이 비정상적으로 두꺼워지는 유전병으로 인구 500명당 1명꼴로 발생한다. 심한 경우 젊은 나이에 돌연사를 유발한다. 김진수 단장은 "앞으로 혈우병 등 1만 가지 이상의 유전 질환을 예방할 수 있도록 연구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부모의 유전병을 수정란에서 원천 차단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세포에서 특정 DNA만 골라 잘라내는 단백질 효소이다. 유전자 가위로 인간 수정란의 질병 유전자를 교정하는 연구는 중국이 2015년 먼저 성공했다. 하지만 영국 런던대의 얄다 잠시디 박사는 "이번 한·미 연구진의 연구는 유전자 가위로 인간 수정란에서 질병을 유발하는 돌연변이 DNA를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음을 보여준 첫 사례"라고 평가했다. 중국 연구에서는 돌연변이 유전자 제거 효율이 크게 떨어지고 엉뚱한 유전자까지 제거하는 경우가 생겨 실제 치료에 적용하기엔 불완전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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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한·미 연구진은 교정된 수정란을 얻은 비율이 72.4%였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인공 수정 과정에서 유전자 가위로 정자가 가진 돌연변이 유전자를 먼저 없앤 뒤 난자와 수정을 시켰다. 정자에서 잘려나간 돌연변이 유전자 자리는 난자가 갖고 있는 정상 유전자로 대체됐다. 앞서 중국 연구진은 정자와 난자가 결합한 후에 유전자 가위를 주입했기 때문에 교정 효율이 떨어졌다.

유전자 가위가 정교해질수록 윤리적 논란도 커진다. 이번 연구진은 이를 의식해 질병 유전자를 교정한 인간 수정란을 수정 후 1주일이 되기 전 폐기했다. 김진수 단장은 "유전자 가위는 유전병을 가진 부모가 건강한 2세를 낳는 데에만 쓸 수 있도록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적 기술 있어도 실험은 외국에서

이번 연구로 한국은 다시 한번 유전자 가위 기술에서 세계적 수준임을 인정받았다. 2013년 초 김진수 단장과 미국 하버드대 연구진 등 5개 그룹은 거의 동시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개발했다. 첨단 생명공학 분야에서 한국이 처음부터 주도권을 확보한 흔치 않은 경우이다. 화이자·바이엘·몬산토 등 글로벌 제약, 생물공학 기업들도 앞다퉈 유전자 가위 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 한국은 핵심 기술인 유전자 가위를 제공했다. 하지만 인간 수정란을 다루는 실험은 미국에서 진행됐다. 국내에서는 인간 수정란의 유전자를 변형하는 연구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이나 미국·영국·일본·스웨덴 등에선 유전 질환 치료 연구에 한해 인간 수정란에 유전자 가위 사용을 허용하고 있다.

또 다른 유전자 교정 분야도 우리가 핵심 기술을 확보하고 있지만 원하는 대로 연구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서울아산병원 강은주 박사는 이번 논문의 대표 저자인 미탈리포프 교수와 함께 지난해 11월 네이처에 인간 수정란에서 유전병의 원인이 되는 돌연변이 미토콘드리아(에너지 생산 기관)를 기증받은 난자의 정상 미토콘드리아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는 논문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부모에 난자 기증자까지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가 세 명이 된다고 해서 이른바 '세 부모 아기'로 불리는 유전자 교정 기술이다. 아산병원은 "강 박사와 미탈리포프 교수가 세 부모 아기 연구를 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법규에 막혀 시술이 성사될지는 미지수"라고 밝혔다.

☞유전자 가위

세포에서 특정 유전자를 잘라내는 효소. 손상된 유전자를 없애고 정상 유전자로 갈아 끼우는 데 사용한다. 한국이 기술개발을 주도한 제3세대 유전자 가위인 ‘크리스퍼’는 정확도가 높아 멸종동물 복원, 작물 품종 개량 등에도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