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암(癌) 등 생명이 위급하거나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임상시험 중인 신약을 처방받는 사례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가 빠르게 고령화사회로 진입하면서 암환자가 증가하고 있는 데다 면역 항암제 등 새로운 치료제(신약) 개발 사례가 늘어나면서 환자들의 의료 수요를 충족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02년부터 '임상시험용의약품 응급상황 사용승인 제도'를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말기 암환자 등과 같이 더 이상 치료방법이 없을 경우, 전문적 지식과 윤리적 소양을 갖춘 전문의의 판단 하에 시판허가 전이지만 현재 개발 중인 임상시험용의약품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이 제도는 임상현장에서는 '응급임상'이라고도 불린다.

한 제약사 연구원이 신약 연구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이 제도는 규제당국으로부터 유효성과 안전성을 입증받지 못한 의약품을 해당 의약품이 치료 효능이 있다는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예외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다른 치료수단이 없고 생명이 위급한 환자에게 치료 목적으로 임상시험 중인 의약품을 처방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서 "최근 여러 종류의 치료제 개발이 늘어남에 따라 임상시험 중인 치료제를 원하는 환자가 늘면서 이 제도를 활용하는 건수도 증가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식약처는 생명에 위협을 주거나 대체 치료제가 없는 경우, 임상 2상에서 안전성과 효능이 확인된 '혁신 신약(first-in-class)'에 한해 판매를 먼저 허용하고 임상 3상 결과를 시판 후 제출하도록 하는 '신속 심사 제도'도 운영 중이다.

◆ "고령화로 말기 암환자 증가…의료 수요 늘었다"

1일 식약처에 따르면, 임상시험용의약품 응급상황 사용승인 현황은 ▲2013년 493건 ▲2014년 490건 ▲2015년 714건 ▲2016년 793건 등 지난 4년간 총 2490건에 달한다. 질환별로는 폐암 등 호흡기질환이 가장 많았고, 이어 위암 등 소화기질환, 악성흑색종 등 피부질환, 백혈병 등 혈액질환 순이었다.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의 항암 치료제 등의 신약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응급임상도 늘어난 것으로 풀이된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인구 고령화로 오는 2020년에는 전체 암환자의 3분의 2가 65세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면서 "암 치료를 원하는 환자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임상시험용의약품 응급상황 사용승인 제도는 시판허가 전 안전성과 유효성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의약품을 환자에게 투여하기 때문에 그 사용이 엄격하게 제한돼 있다. 약사법 34조에는 '말기 암 또는 후천성면역결핍증 등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질환을 가진 환자', '생명이 위급하거나 대체 치료수단이 없는 등 총리령으로 정하는 응급환자'로 응급임상의 적용대상을 규정하고 있다.

의사는 응급환자 등에게 임상시험용의약품 사용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 환자의 자발적 동의서, 의약품 제공의향서 등을 준비해 식약처에 응급상황 사용승인을 신청한다. 식약처는 관련 서류를 검토한 후 승인서를 발급하며, 의사는 제약사에 임상시험용의약품 공급을 요청해 대상 환자에게 사용하는 절차를 거치면 된다.

임상시험용의약품 응급상황 사용승인 절차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Expanded Access Program)과 유럽(Compassionate use) 등 의약 선진국에서도 응급상황 사용승인 제도와 동일한 임상시험용의약품의 동정적(同情的) 사용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식약처는 "임상시험용의약품은 안전성과 유효성이 완전히 입증되지 않은 의약품이기 때문에 반드시 임상시험 목적으로만 사용이 제한돼야 하지만, 약사법에서 규정한대로 다른 치료수단이 없고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치료 기회 부여 등의 차원에서 환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임상시험용의약품 공급 주체는 해당 의약품이 시판허가 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과 이 제도의 취지 등을 고려해 무상으로 공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임상시험용의약품 응급상황 사용승인 제도는 의사, 환자, 제약사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는 제도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의사와 환자에게는 새로운 대체치료법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점에서, 제약사에게는 개발 중인 신약을 허가받을 때 응급임상 데이터가 반영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 "약값만 천만원인데"…제약·바이오업계 "무상 제공에 대한 인센티브 있어야"

"제도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1000만원에 달하는 약을 무상으로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너무 큽니다. 의약품을 제공하는 기업에는 정부가 각종 혜택을 줘야 할 것입니다."

국내 굴지의 제약·바이오 기업 A 대표는 정부가 운영하는 응급임상 제도에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무상 제공 자체가 이 제도의 원칙인 만큼 시판허가를 앞둔 의약품일수록 공급자 입장에서는 부담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기업의 부담이 크다며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제약업계의 한 관계자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개발 중인 신약을 무상으로 환자에게 제공하고 제약사는 이를 통해 임상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제도의 취지를 잘 알고 있다"면서도 "시판허가를 목전에 두고 있는 혁신 신약은 상업화할 경우 성공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시판 전 무상으로 제공하는 데에 대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식약처는 임상시험용의약품 제공자(제약사)에 대한 세제 지원 등의 혜택이나 인센티브 부여 방안 등은 범정부 차원에서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밝혔다. 다만 식약처는 "임상시험용의약품 응급상황 사용승인 제도는 식약처가 안전 관리 측면에서 관장하고 있다"면서도 "지난해말 '의약품 등의 안전에 관한 규칙 일부개정령(안)'을 입법예고했고, 현재 개정 작업 중에 있다"고 말했다.

식약처가 입법예고한 의약품 등의 안전에 관한 규칙 일부개정령(안)에는 임상시험용의약품이라 하더라도 생산에 고(高)비용이 소요될 때, 원가 보전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만큼 '생산 원가수준'에서 환자에게 해당 의약품의 비용을 청구할 수 있도록 정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식약처 관계자는 "이는 '국제의약품규제조화위원회(ICH)' 기준을 받아들인 것으로 임상시험용의약품 제공자인 제약사 입장에서는 일정 부분 환자로부터 돈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유럽은 무상 제공이 원칙이지만, 미국은 이같은 예외를 두고 있다"고 덧붙였다.

식약처는 지난해 11월 ICH 정회원으로 공식 가입했다. 이번 가입은 의약품 규제당국자로서는 미국, 유럽위원회(EC), 일본, 스위스, 캐나다에 이은 6번째로 이뤄진 것이다. 1990년 설립된 ICH는 의약품 안전성, 유효성, 품질 등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개정하는 의약품 규제 분야 국제협의체다. 그동안은 미국, EC, 일본, 스위스, 캐나다 등 5개 의약품 규제당국자와 미국·유럽·일본제약협회로 구성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