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방문 관련 경제인사절단에 포함된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이 이미 미국 출장길에 오른 것으로 확인됐다.

26일 현대차그룹 관계자에 따르면 정 부회장은 오는 28일로 예정된 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앞서 지난주 초 미국으로 출국했다. 정 부회장은 올해들어 부진한 판매 실적을 보이는 미국 현지 상황을 점검하고 대응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정 부회장이 현지에서 구체적인 미국 내 추가 투자계획을 발표할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트럼프 정부 출범 직후인 올해 초 현대차는 오는 2021년까지 미국에 31억달러(약 3조52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미국 방문길에서 정 부회장이 구체적인 투자계획 발표 등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 부회장의 방미 경제사절단 참여는 개인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정 부회장은 다보스포럼과 글로벌 모터쇼,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등 여러 굵직한 행사에 참석해 왔다. 그러나 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을 대신해 국가간 정상이 함께하는 자리에 동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들어 글로벌 무대에서 보폭을 넓히고 있는 정 부회장이 국내외에서 현대차그룹을 대표하기 위해 나선 실질적인 첫 무대인 셈이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오는 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3박5일 일정으로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취임 후 처음으로 만난다. 문 대통령은 29일과 30일 이틀에 걸쳐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환영만찬, 정상회담, 공동기자회견 등 공식 일정을 갖는다.

◆ G2(美·中) 판매 부진 고전하는 현대차…정 부회장이 제시할 해결책은?

현대차는 미국 시장과 관련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올들어 감소 추세인 판매량을 정상으로 되돌려야 하고 현재 공석(空席)인 미국법인 경영진의 선임도 마무리지어야 한다.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보호무역 정책에 대한 대응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정 부회장이 대통령 경제 사절단 동행에 앞서 미국 출장길에 오른 것은 이같은 다양한 현안에 대한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올들어 미국 시장에서 현대차 판매량은 눈에 띄게 감소했다. 1월부터 5월까지 현대차의 미국 판매대수는 29만1853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8% 줄었다. 특히 5월 판매대수는 6만11대에 그쳐 전년동월(7만1006대)보다 15.4%나 감소했다.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 광고와 마케팅에 대대적 투자를 진행해 왔지만 최근 판매 실적은 부진하다. 사진은 지난해 슈퍼볼이 열린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 리바이스 스타디움 전광판에 등장한 현대차 광고

가뜩이나 올들어 중국에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따른 반한감정 확산으로 판매량이 급감해 궁지에 몰린 현대차로서는 미국 시장 판매실적 회복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다. 최근 인도와 러시아 등 신흥시장에서 신차를 앞세워 판매량이 점차 늘고 있지만 세계 1, 2위 자동차 시장인 중국과 미국에서 판매 부진이 길어진다면 현대차 실적이 회복되기 어렵다.

현대차의 미국 판매가 부진한 상황임에도 현대차 미국법인(HMA)은 수개월째 리더십 공백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 미국법인은 2014년부터 대표로 일했던 데이브 주코브스키 전 CEO가 지난해 12월 판매 부진 등을 이유로 경질된 후 지금껏 제리 플래너리 수석부사장 대행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달 초에는 데릭 하타미 판매총괄 부사장마저 회사를 떠났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이후 자국산업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외국 자동차 업체를 압박하고 있는 점도 고민거리다. 만약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측이 두 나라간 자유무역협정(FTA)의 수정이나 폐기를 요구할 경우 FTA 수혜 기업으로 꼽혀온 현대차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동차 업계 일각에서는 정 부회장이 이번 한·미 정상회담 기간 중 구체적인 미국 투자계획을 밝힐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한·미 FTA의 수정 또는 폐기를 주장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정부의 주요 타깃이 자동차 산업인만큼 정 부회장이 미국의 통상압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적극적인 미국 투자계획을 발표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이미 미국 수출비중이 큰 기업들을 중심으로 발 빠르게 미국 투자계획을 밝힌 곳이 많다. LG전자는 미국 테네시주에 신규 가전제품 생산공장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3억달러를 투자해 가전제품 공장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최근 현대차는 과잉생산 문제로 고심하고 있기 때문에 전자업체들과 같은 대대적인 신규 공장 설립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며 “자율주행차나 전기차 등 미래 신기술과 관련된 연구개발(R&D) 시설 확대 등으로 미국 신규 투자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현대차그룹 대표로 재계 첫 데뷔…CES·코나 소개 이어 글로벌 보폭 본격 확대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지난 13일 고양 모터스튜디오에서 소형 SUV 코나를 소개하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현대차그룹을 대표해 정·재계 주요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정몽구 회장의 몫이었다. 정 부회장은 제네시스 브랜드에 대한 소개나 현대차의 친환경 미래 전략 소개 등 실무적인 부분에서 직접 나서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주로 아버지의 뒤를 묵묵히 따르는 ‘조용한 황태자’의 역할에만 주력해 왔다.

재계에서는 정 부회장의 이번 대통령 방미 경제인 사절단 동행이 현대차그룹의 본격적인 ‘3세 경영 시대’를 의미하는 신호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른 주요 그룹의 경우 이미 발 빠르게 3세 경영 체제로 접어든 곳이 많다. 삼성의 경우 지난 2014년 이건희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이재용 부회장이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해 왔고, 올해 초에는 효성 조석래 전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 회장이 취임했다.

정 부회장은 올 초부터 예년에 비해 부쩍 대외활동의 보폭을 넓혀왔다. 지난 1월 미국에서 열린 CES에서는 연사로 나서 현대차의 미래 모빌리티 전략을 발표했다. 제네바모터쇼와 서울모터쇼, 뉴욕모터쇼, 상하이모터쇼 등 올 상반기 열린 주요 모터쇼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엔비디아와 모빌아이 등 차세대 자율주행 자동차와 관련된 주요 글로벌 기업들과도 활발하게 접촉하며 미래 신기술 개발도 진두지휘했다.

특히 정 부회장은 지난 13일 신차발표회에서 현대차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코나를 직접 소개해 주목받았다. 흰 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코나와 현대차의 전략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한 정 부회장은 단연 이날 행사의 주인공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 오너가가 신차를 소개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정 부회장의 프레젠테이션이 더욱 화제를 모았다”며 “정 부회장의 대통령 방미 사절단 동행은 대내외에 현대차그룹의 3세 경영 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를 던져주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