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중세 유럽. 흑사병(페스트)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500만명이 페스트에 희생됐다. 그 후 6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염병과 함께 살고 있다. 페스트는 유럽에 집중됐지만 지금은 오히려 전선이 확대되고 있다. 서아프리카에는 에볼라 바이러스, 남아메리카에는 지카 바이러스가 공포의 대상이다. 중동에는 꼭 2년 전 한국을 강타했던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가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홍역·살모넬라·콜레라·말라리아·소아마비처럼 역사책에나 등장할 법한 전염병조차 지구상 어디에선가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있다. 이대로 인류는 전염병에 굴복하는 것일까.

전염병 대유행하면 3일이면 전 세계 퍼져

지금까지 인류는 수많은 전염병을 정복했다. 페스트는 20세기 후반 이후 항생제의 보급으로 종적을 감췄다. 16세기에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아스텍·잉카·뉴질랜드·이스터섬 등 가는 곳마다 문명을 말살한 천연두는 백신으로 이겨냈다. 1980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의 박멸을 공식 선언했다.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는 1981년 처음 환자가 확인된 이후 지금까지 280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1995년 세 가지 약을 동시에 쓰는 항바이러스 요법이 개발되면서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조절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분류되고 있다.

하지만 인류가 전염병을 극복하고 돌아서면 언제나 새로운 전염병이 등장하고 있다. 전염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백신이나 치료법 개발 속도보다 빠르게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진화 속도는 인간보다 4000만배 빠르다. 게다가 동물의 몸에만 기생하던 바이러스가 인간으로 옮겨오면서 신종 전염병도 급증하고 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1980년대 991건 발생했던 전염병은 1990년대에는 1924건으로 늘었고, 2000년대에는 3420건으로 급증했다. 이 중 1818건이 동물을 통해 전염된다.

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지금 전염병의 대유행 ‘판데믹’이 일어나면 인류 전체가 순식간에 휘말릴 수 있다.

과학자들은 이제 페스트 못지않은 새로운 '판데믹(pandemic·전염병의 대유행)'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초연결(超連結)된 지구에서 나타날 수 있는 판데믹에 우리는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서 "전 세계를 위협할 가장 시급한 안보 현안은 바로 전염병"이라고 지적했다.

비행기를 타면 지구 반대편에 반나절이면 도착한다. 사람이 옮기는 전염병은 순식간에 지구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구밀도도 계속 높아지고 있다. 치명적인 전염병이 생겨나면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감염될 수 있다. 지난 1월 일본 국립감염병연구소는 도쿄 시내에서 사람 사이에 전염되는 조류인플루엔자(AI·Avian Influenza) 환자 단 한 명이 발생하면 2주 만에 일본 전역에서 35만명이 감염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2014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연례총회에서는 "전 인류가 판데믹에 휘말리는 데에는 72시간이면 충분하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중국발 AI 바이러스가 가장 큰 위협

현재 과학자들이 가장 우려하고 있는 전염병 바이러스는 중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AI 바이러스 'H7N9'이다. 지난겨울 한국에서 발생했던 AI 바이러스는 H5N6였다. 전염 속도는 빠르지만 사람은 감염되지 않는다. H7N9은 다르다. 올해만 500명이 넘는 중국인이 조류를 통해 H7N9에 감염됐고 감염된 사람의 88%가 폐렴으로 이어졌다. 감염자의 41%가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치사율도 높다.

H7N9의 유일한 약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잘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과학자들은 "아직까지는 그럴 뿐"이라고 말한다. H7N9이 변이를 일으켜 감기처럼 순식간에 전염성이 강해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CDC는 최근 H7N9을 판데믹의 위협이 가장 높은 전염병으로 위험도를 격상했다. 2014년 1만1300여 명을 죽음으로 내몬 에볼라 바이러스는 물론 아직 치료제가 없는 독감도 언제든 더 강력하게 바뀔 수 있다. 아시시 자 하버드대 국제 보건연구소장은 "수백만 명의 사람을 짧은 시간에 죽일 수 있는 위협 중에서 10년 내에 가장 일어날 가능성이 큰 것은 판데믹"이라고 말했다.

백신 개발·DNA 해독… 전염병 막을 '국제연합군' 뭉쳤다

◇백신 개발·DNA 해독… 전염병 막을 '국제연합군' 뭉쳤다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판데믹(pandemic·전염병 대유행)을 맞아야 할까. 과학자들은 느리지만 끈기 있게 전염병에 대항할 무기를 만들고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전염병을 예방하고 방지하는 검역(檢疫)이다. 치명적인 에볼라 바이러스가 서아프리카에서 머물고 있는 것, 2010년 아이티 지진 현장에서 발병한 소아마비와 콜레라가 조기 진화된 것도 세계 각국이 검역 체계를 강화하고 정보를 공유한 덕분이다.

하지만 메르스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전염병에 대한 완벽한 검역은 불가능하다. 또 검역을 강화하면 경제적 피해도 생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3년 발생한 사스(SARS·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는 사망자가 800명이 채 되지 않았으나 교역 중단과 교통 통제 등으로 540억달러(약 60조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 세계은행은 새로 판데믹이 발생하면 경제적 손실이 4조달러(약 4474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전 세계 경제가 파탄 난다는 것이다.

◇에볼라 백신은 아프리카서 공급 시작

판데믹을 막을 가장 확실한 무기는 예방용 백신이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를 비롯해 각국 정부와 민간단체들은 백신 개발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WHO의 마리 폴 키니 박사는 지난해 에볼라 백신을 개발해 인체 시험에 성공했다. 백신은 유럽연합의 승인을 거쳐 미국 제약사 머크가 생산하고 있다. 이 백신은 지난달 12일 에볼라가 발병한 콩고민주공화국에 긴급 투입됐다.

유전자(DNA)를 이용한 새로운 백신도 개발 중이다. 미국 바이오 기업 이노비오는 바이러스를 죽이거나 약화시켜 사람에게 넣는 기존 백신 방식 대신 바이러스의 핵심 인자가 기능 하지 못하도록 하는 DNA 조각을 넣은 백신을 만들었다. 현재 지카와 메르스 바이러스 백신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가 세운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재단은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신종 전염병에 대항할 '전염병대비혁신연합(CETI)'을 출범시켰다. 앞으로 5년간 10억달러(약 1조1180억원)가 백신을 개발하는 기업과 과학자들에 지원된다.

게이츠가 CETI를 설립한 것은 전염병 백신 개발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장 장벽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현재의 전염병은 대부분 저개발 국가에서 유행한다. 이 국가들이 백신이나 치료제를 구매할 능력이 없다 보니 제약사들은 시장성이 떨어진다고 보고 개발에 소극적이다. 하지만 게이츠는 "전염병은 언제든 다른 나라로 확산될 수 있고,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염병을 뿌리 뽑는 것이 곧 전 세계를 구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바이러스 50만종 DNA 해독도 시작

최근 전염병 연구에서 주목받는 또 다른 분야는 전염병 데이터베이스 구축이다. UC샌프란시스코 애보트 진단센터는 바이러스와 세균 800만종에 대한 DNA 분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신종 전염병이 발생하면 환자의 몸에 있는 병원체의 DNA와 데이터베이스를 비교해 정체를 밝힐 수 있다. 찰스 치우 센터장은 지난달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1980년대에는 새로운 전염병의 원인을 밝히고 DNA를 분석하는 데 2년이 걸렸다"면서 "지금은 100분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미국 국제개발처 등이 향후 10년간 34억달러(약 3조 8000억원)를 투자하는 '글로벌 바이러스 유전체 프로젝트(Global Virome Project)'도 시작됐다. 인간과 동물의 몸 속에 살거나 외부에서 감염될 수 있는 바이러스 50만종의 DNA를 모두 분석해 전염병을 근절할 근본적인 방법을 찾겠다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