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저격수'로 불리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사진)의 재벌개혁 전략에 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20년 넘게 소액주주 운동, 재벌개혁 운동을 해 온 만큼 누구보다 기업지배구조에 빠삭한 그다.
지난 2004년 2월 김 내정자는 소액주주들의 위임을 받아 삼성전자(005930)주주총회에 참석했다가 보안 요원들에게 끌려나와 바지가 찢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주총장에서 소액주주가 발언하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을 정도로 기업 주총 문화가 경직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랜기간 경제개혁 운동을 해 오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과격한 개혁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실현 가능성이 낮은 법 개정에 매달리기보다 현행법을 원칙대로 구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현실적인 개혁가'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김 내정자는 재벌개혁 성공을 위해서는 규율수단의 체계적 합리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월 기자들과 만나 "재벌개혁은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는 과제가 아니다"며 "오랜기간 동안의 일관된 노력이 요구되는 진화의 과제로,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것이야말로 재벌개혁의 최대 장애물"이라고 강조했다.
◆ 재벌개혁 단기 과제는 상법개정...전자 서면투표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도입
그는 재벌개혁을 위한 단계를 '단기-중기-장기' 등 세 단계로 크게 나누고 있다. 단기 최우선 과제는 상법 개정과 자본시장법 개정이다.
미르재단과 K스포츠 재단 출연 사태를 보면, 한국을 대표하는 53개 기업이 두 공익법인에 총 774억원을 출연했다. 그러나 이사회 의결을 거친 기업은 두곳 뿐이다. 이사회 아래 윤리위원회 등 하부위원회에 보고된 기업도 두곳 뿐인데, 그나마도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이는 우리나라 기업의 이사회, 특히 사외이사 제도가 내부통제 장치로서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고 거수기에 머물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정경유착을 근절하는 근원적인 해결책은 투명성과 책임성을 갖춘 기업지배구조의 구축에 있고, 이를 위해서는 상법 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상법을 개정하겠다는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2013년 취임하면서 일감몰아주기 규제, 신규 순환출자 금지 등 공정거래법 관련 공약을 상당 부분 이행했지만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김 내정자는 전자 서면투표제를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하거나 주주 수가 일정 기준 이상인 회사부터 단계적으로 도입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있다.
또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고 감사위원을 분리 선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둘 중 하나만 우선적으로 도입된다면 감사위원 분리 선출이 더 중요성이 높다는 입장이다.
현재 기업의 감사위원은 일괄선출 방식으로 선임되고 있다. 상법 제542조12 2항은 이사를 선임후 이들 이사 중에서 감사위원회 위원을 선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괄선출 방식은 대주주의 의결권 제한이 이사 선임 단계에 적용되지 않고 감사선임 단계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사실상 감사위원 선임시 대주주의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의결권제한 규정이 의미가 없다.
이에 따라 감사위원인 이사와 감사위원이 아닌 이사를 구분선임해 감사위원인 이사 선임 시 최대주주의 의결권 제한을 적용받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또 집중투표제를 정관에서 배제할 수 없도록 하되, 자본금 또는 주주 수가 일정 기준 이상인 상장사부터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 자본시장법 개정...스튜어드십 코드 '5%룰' 예외둬야
그는 다중대표소송제도 도입도 제안했다. 다중대표소송 제도는 자회사의 이사가 불법행위로 회사에 손실을 끼친 경우, 모회사의 주주가 자회사의 이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2006년 법무부가 도입하고자 했지만 재계의 반대로 상법 개정에 실패했다.
현행 상법에 따르면 발행주식총수의 1% 이상 주식을 가진 주주만이 회사에 대해 이사의 책임추궁을 위한 소송(주주대표소송)을 할 수 있도록 돼있다. 이 탓에 지배주주나 경영진이 비상장법인을 통해 사익을 추구해 비상장사에 손해를 끼친 경우 그 손실은 모회사인 상장회사에 전가되지만 현실적으로 회사의 손실을 보전받을 방법이 없다.
다중대표 소송 제도 도입시 모자회사의 지분요건이 중요하다. 기업법상 30% 이상 지분을 보유할 경우 지배관계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고있고, 공정거래법 제2조 2호가 규정한 기업집단 계열사 정의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준도 30%인만큼, 30% 이상 출자관계로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김 내정자는 제안했다.
그는 단기 최우선과제로 기관투자자의 주주권 행사 활성화를 위한 자본시장법령 개정도 제안했다.
2015년 7월 삼성물산 합병 주총 당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향방이 주총 통과 여부를 좌우하는 상황이었다. 찬반을 결정하기 어려운 민감한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간의 의결권 행사 절차나 관행과는 달리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에 안건을 부의하지 않고 투자위원회에서 독단적으로 찬성 결정했다.
이후 특검 수사 결과 청와대 경제수석과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에 부당한 압력을 가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 대가로 최순실 일가에게 부당한 특혜가 제공된 혐의가 드러났다.
이에 따라 기관투자자의 주주권 행사 모범규준인 스튜어드십 코드가 지난해말 도입됐으나, 아직 이를 채택한 기관투자자들은 없다.
또 기관투자자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기관투자자들이 공동으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 '기관투자자간의 협력' 원칙이 포함돼야 하지만, 선진국과는 달리 이게 빠져있다.
'기관투자자간의 협력' 원칙이 없으면 현행 자본시장법령 '5%룰(대량보유신고)' 위반 사유가 되기 때문에 법적 불확실성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행 자본시장법 시행령 154조는 주식을 5% 이상 보유하고 있으면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5%는 본인 및 특별관계자의 보유분을 합산한 지분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공동보유자도 특별관계자에 포함되므로 기관투자자들이 공동행동에 나서면 공동보유자로 간주돼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국민연금이 즉각 스튜어드십 코드에 가입하고, 주주권 행사를 위한 지침을 마련해야 한다는 게 김 내정자의 판단이다.
◆ 출자총액제한 제도 현실성 없어…"정치적 논란만 가중, 거론하지 말아야"
다만 김 내정자는 출자총액제한 제도의 부활 등은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자총액제한 제도는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인 지난 1월 그의 씽크탱크인 '정책공간 국민성장'에서 10대 재벌에 한해 부활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출자총액제한 제도는 규제기준에 대한 객관적 근거를 갖추기 어렵다. 또 10대 재벌로 규제대상을 한정하면 SK·LG·GS·한진그룹 등은 이미 지주사체제로 전환해 이 대상에서 제외된다.
두산그룹은 지주사 체제였다가 최근 '주된 사업요건(보유한 자회사 주식가액이 총자산의 50% 초과)'에 미달해 지정 제외됐으나 언제든지 지주사 체제로 복귀할 수 있다.
현대중공업그룹과 롯데그룹도 멀지 않은 기간내 지주사 체제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그룹은 순자산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출자비율 규제기준(순자산의 30%)에 한참 미달하는 상태다.
순환출자가 총수일가의 그룹 지배권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그룹은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현대산업개발그룹 등 3개 그룹에 불과한 실정이다. 따라서 10대 재벌 대부분이 출총제 적용대상이 아니거나 규제 효과가 없다.
김 내정자는 "출자총액제한 제도 부활이나 기존 순환출자 규제는 그 경제적 효과는 크지 않으면서 오히려 정치적 논란만 가중시킨다"며 "정작 필요한 재벌개혁 논의를 중단시키는 역작용만 야기하므로 다시는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내정자는 중기 과제로는 공정위의 전속고발권 폐지 내지 완화, 공정거래법과 하도급법에 3배 손해배상제도 전면 도입, 은산분리 규제체계의 재설계, 비은행권 금산분리 규율체계의 재설계, 법인세법상 수입배당금 익금불산입률의 조정 등을 제안했다.
전속고발권과 관련, 김 내정자는 전속고발권을 폐지하면 다양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폐지보다는 완화가 바람직하다고 봤다. 김 내정자는 "전속고발권을 전면 폐지하는 것보다는 지배력 남용행위와 관련된 시장지배적 지위남용 금지(공정거래법 제3조의2) 등과 같이 우선적인 사항에 대해서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20대 국회의 남은 임기인 3년여동안 추진할 장기 과제로는 의무공개매수 제도 도입, 소액주주 사외이사 선임권 확대(독립이사 후보 추천권), 대기업집단법(가칭) 제정 등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