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은 대한민국 전체 기업의 99%, 고용 인원의 88%를 차지한다. 여기서 따온 ‘9988’은 중소기업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상징한다. 새 정부 출범 닷새 만에 맞은 중소기업주간(15일~19일), 중소기업계는 문재인 정부 출범을 계기로 우리 경제 패러다임을 중소기업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조선비즈는 ‘대기업-중소기업’으로 이분화된 산업 구조를 진단하고 중소기업이 나아갈 방향을 진단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경기 시흥시 정왕동 시화공단에 위치한 한 공장의 벽면. 공단 곳곳의 기둥이나 전봇대엔 ‘중고차’, ‘가장 싼 공장, 바로 입주’, ‘장비 매입’ 등의 내용이 담긴 현수막과 스티커가 가득했다.

“삐삐삐삐.”

15일 오후 2시, 경기 시흥시 정왕동에 위치한 ‘D산업’ 공장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자물쇠로 굳게 닫힌 공장 내부를 기자가 들여다보는 순간이었다. 요란한 경고음에 화들짝 놀라 한 발짝 물러섰다. 사이렌은 몇 분간 울리다 그쳤다. 공장엔 아무도 없었다.

D산업 공장은 한동안 가동을 멈춘 상태였다. 야지엔 쓸모를 잃은 철제 기자재들만 휑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공장에서 무슨 작업을 했는지는 공장 입구 간판에 적힌 ‘비철’이라는 표기로만 가늠할 수 있었다.

D산업 공장 바로 옆, A수출포장 공장에선 상자 포장지 가공 작업이 한창이었다. 너덧 명 되는 직원이 상자 포장지를 정리하고 있었다. A수출포장의 김모 과장은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산량이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경기 시흥시 정왕동 시화공단에 위치한 한 포장지 제조공장에서 직원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A수출포장은 택배사, 식품 가공업체, 서점 등 100여 개 업체와 거래하고 있다. 김 과장은 “포장재 제조업체는 불경기에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업종”이라며 “수출이 안 되니 수출용 상자 판매가 줄고, 내수도 소비재 판매 감소로 상자 포장지 수요가 급감했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대표 산업단지인 시화·반월공단을 떠나는 중소기업이 늘고 있다. 이 지역에서 공장 매매를 주로 하는 C부동산 관계자는 “공장이 많이 떠나면서 매물이 많이 나오고 있다”면서 “새로 들어오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인력 사정도 열악하다. 인력은 수요보다 공급이 문제다. 일용직 근로자를 중개하는 ‘B인력’의 대표는 “예전에도 ‘어렵다’고 많이 했지만, 요즘은 진짜 심하다”며 “그런데 더러 사람 필요하다는 회사는 나오는데, 여기에서 일하겠다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 생동감 잃은 중소기업 산업단지…가동 중단 늘어

이날 시화공단에선 활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몇몇 제지공장에만 지게차가 돌아다녔을 뿐 거리와 공장 주변 골목은 한산했다.

스마트폰용 젠더와 소켓을 제작하는 금형 업체도 공장 가동을 멈춘 곳이 수두룩했다. 공장 사무실에서 만난 직원들은 경기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어려운 걸 뻔히 알면서 물어보냐”는 식으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반월공단에서 컨버터 등을 제작하는 U사의 김모 대표는 “우리 회사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라면서 “공장을 가동하는 업체가 상당히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발주량이 줄어 대부분 공장 가동률을 낮추고 있다”면서 “계약을 따내 물량을 확보한 업체 중에선 인력이 없어 생산에 차질을 빚는 곳이 많다”고 말했다.

한 판금업체 대표는 “젊은 사람들은 이곳에 일하러 오지도 않고 지금 있는 사람으로 겨우 회사를 꾸려가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최저임금도 올린다고 하고, 근무시간도 단축한다고 하니 걱정이 크다”고 했다. 이 대표는 “그나마 투자 여력이 있는 업체는 베트남 등으로 공장을 옮기려고 알아보지만, 영세 업체에는 ‘그림의 떡’이다”고 덧붙였다.

한때 경기 산업단지의 핵심으로 거론됐던 시화·반월 공단의 제조업종에서 근무하는 종사자 수는 23만4000여 명으로 전국의 5.9%를 차지한다. 제조업체 수는 2만1488개사로 전국 대비 5.4%에 이른다. 하지만 지역총생산(GRDP)는 38조6000억원으로 전국 대비 2.7%에 불과하다. 홍병진 중소기업진흥공단 경기서부지부장은 “이 지역 공장들이 영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며 “일반적으로 제조업체 수와 종사자 수, 지역총생산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다”고 말했다.

시화·반월공단 가동률은 지난해 12월 기준 70.9%, 생산액은 4조4102억원으로 전월 대비 각 2.7%포인트, 3.8%포인트 감소했다. 지난해 9월 기준 전국 평균 가동률은 79.3%다. 가동률 감소로 공단 내 고용인원 역시 줄어들었다. 총 고용인원은 18만8628명으로 전월 대비 1.1%(2120명) 감소했다. 공장 가동이 줄면서 기업 채산성이 약화되고 재무구조가 악화되는 등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때 금융기관이 자금을 회수하면 중소기업은 폐업의 나락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시화·반월공단에 입주한 중소기업 수는 2015년 1만9000여 개에서 지난해 말 1만8000여 개로 1000개가량 줄었다. 입주 기업 수는 계속해서 줄어드는 추세다. 홍병진 지부장은 “중소기업들이 더 저렴한 공장 부지를 찾아 남쪽 산업단지로 계속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시화공단 등 수도권 지역 공장 임대료는 지난해까지 3.3㎡당 3만3000원 선이었으나 최근에는 3만원까지 하락했다. 이뿐만 아니라 시화공단 인근 기계유통단지에는 폐업한 공장에서 나온 중고 기계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지만 사겠다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시화·반월공단의 쇠락은 한국 제조업 위기를 압축해 보여준다. 이곳에 있는 공장 대부분은 대기업으로부터 하청을 받고 있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중국과의 경쟁으로 인한 불황 타격을 맨몸으로 맞고 있다. 공단 관계자는 “대부분 업체가 대기업의 2·3차 하청 업체”라며 “일감이 있을 때는 바쁘고 일감이 없으면 휴·폐업을 한다”고 했다.

국내 중소기업 주요 지표 현황.

◆ 도산 위기 처한 중소기업,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

국내 중소기업의 위기는 시나브로 악화하다 지난해 말 정점을 찍었다. 금융감독원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신용위험을 평가한 결과, 법원 기업회생절차 대상 기업으로 분류된 기업(D등급)은 105개사였다. 워크아웃 대상(C등급)까지 합하면 176개사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이후 최대 규모다.

중소기업의 위기 상황은 경영 실적 관련 각종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한국경제연구원이 9071개 중소 제조업을 분석한 결과, 3년 연속 영업이익이 이자 비용에도 못 미친 ‘한계기업’ 비중이 2012년(5.7%)까지 5%대를 유지했지만 2013년(7%)부터 급상승하며 2014년 8.4%, 2015년 9.2% 등 매년 올라갔다. 업계는 지난해부터는 한계기업이 10%를 초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제조업 업종의 경영 위기는 훨씬 심각하다. 지난 3월 산업연구원이 발간한 ‘중소기업 정책 활용도’ 보고서에 따르면 제조업·정보통신기술(ICT) 중소기업 1571개 중 21.1%인 332개사가 경쟁력 위기 한계기업으로 지목됐다. 조덕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소기업의 수출역량과 조직학습역량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정부에서 다양한 중기 지원 정책을 내고 있지만 이를 잘 활용하는 기업은 상위 30%에 불과하며, 하위 70%는 정책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조 연구위원은 꼬집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기업의 성장이 주춤한 상황에서 중소기업마저 성장을 멈추면 고용 등에서 우리 산업계의 탈출구가 완전히 틀어막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쟁력 순위 하위 70%에 속하는 중소기업을 위한 지원 대상 선별 기준을 정비해야 한다”며 “매년 중소기업의 규모·전략군별 경쟁력 수준 등을 조사해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DB

◆ ‘낙수효과는 없었다’.. 기업 경쟁력 높이는 정책으로 ‘9988’을 벗자

국내 중소기업은 전체 기업체 수의 99.9%, 고용의 87.9%, 생산의 50.6%, 부가가치의 53.6%(2014년 기준)를 차지한다. 기술 혁신을 주도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생산과 고용의 핵심으로서 한국 경제의 반석 역할을 해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간 경제 패러다임은 대기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기업이 성장하면 이로부터 하청받는 중소기업도 함께 성장할 것이라는 낙수효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낙수효과는 없었다.

지난 2월 중소기업연구원이 발간한 ‘낙수효과에 관한 통계분석이 주는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삼성전자의 3차 협력업체 간 매출액 격차는 2000년 5850대 1에서 2014년 1만3100대 1로 두 배 이상 벌어졌다. 홍운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경제 전반의 파급 효과에 관한 거시적인 통계 분석결과를 보면, 이미 대-중소기업 간에는 낙수효과가 약화되거나 크지 않다. 오히려 디커플링(de-coupling)이 심화됨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대·중소기업의 임금·근로 조건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대기업 임금을 100으로 기준했을 때, 중소기업 임금수준은 1994년 78.2에서 2015년 59.4로 줄어들었다. 대기업-중소기업간 임금 격차는 극심한 사회 양극화를 야기했다.

이제는 대기업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다수가 중심이 되는 사회경제시스템의 정착이 필요하다고 중소기업계는 강조한다.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대기업엔 유리하고 중소기업엔 불리한 경영환경에 변화가 필요하다”며 “대기업·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행위를 확실하게 처벌하고, 중소기업 근무환경과 사회 인식을 개선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계에 만연한 ‘현상 유지 주의’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산업계 관계자는 “‘9988’이 중소기업의 중요도를 보여주는 수치이긴 하지만, 반대로 몇 년째 9988을 말하는 것은 국내 산업구조의 정체성을 반증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을 지나 대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지적이다.

조덕희 연구위원은 “경제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중소기업 비중은 경제 전반의 생산성 부진과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특히 저임금·비정규직 고용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중소기업 9988’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 회장은 “중소기업 지원 정책이 과도하면 기업이 성장하고 싶지 않은 ‘피터팬 증후군’이 만연할 수 있다”며 “성장 가능성이 있는 중소기업을 잘 육성해 중견기업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데 정책 주안점을 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