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미국 제약사 카이트 파마는 유전자를 변형시킨 면역세포로 기존 치료제가 듣지 않던 림프종 환자의 3분의 1을 완치시켰다고 발표했다. 림프종은 면역체계인 림프계에서 발생하는 암으로, 백혈병과 함께 대표적인 혈액암이다. 카이트 파마는 환자 101명을 대상으로 한 임상2상시험에서 6개월 뒤 환자 36%는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졌고, 82%는 암세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예일대 암병원장인 로이 허브스트 박사는 "놀라울 정도로 고무적인 성과"라고 극찬했다.

인체 면역세포로 만든 신세대 항암제가 상용화의 문턱에 왔다. 카이트 파마가 만든 항암제는 'CAR(키메라 항원 수용체)-T세포'. 암세포를 찾아내 공격하는 인체 면역체계의 주력군인 T세포에 유전자를 새로 집어넣어 항암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한 번 몸에 넣어주면 증식하면서 계속 약효를 내기 때문에 '살아있는 약물' '암세포의 연쇄살인마'로 불린다.

카이트 파마는 곧 미국 식품의약국(FDA) 시판 허가를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카이트 파마의 주가는 16% 급등했다. 애널리스트들은 약이 나오면 연간 15억달러 시장을 이룰 것이라고 추산했다. 신약 가뭄에 빠진 세계 제약산업에 조 단위 특급 항암제가 탄생하는 것이다. 카이트 파마에 이어 스위스 제약사 노바티스도 FDA에 자체 개발한 CAR-T세포를 소아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치료제로 허가를 신청할 계획이다.

암세포(파란색)를 공격하는 T세포들(노란색). 최근 암세포에만 있는 항원을 찾도록 T세포에 유전자를 추가해 ‘살아있는 약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올해 처음으로 난치성 혈액암에 대한 T세포 치료제가 미국에서 시판 허가를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1980년대부터 T세포를 치료제로 개발

T세포를 치료제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처음에는 환자의 몸에서 T세포를 꺼내 실험실에서 배양한 다음, 수가 늘어난 T세포를 다시 환자에 주입하는 방법을 썼다. 하지만 약효가 오래가지 않았다.

원래 T세포는 나뭇가지 모양의 면역세포인 수지상세포로부터 암세포를 발견했다는 신호를 받으면 작동하기 시작한다. 정찰병의 신호를 받고 주력군이 출동하는 형태다. 199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몸 밖에 꺼낸 T세포에 수지상세포를 노출시켜 에이즈를 치료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사람마다 수지상세포가 제각각이어서 큰 효과가 없었다.

대안으로 나온 것이 단백질로 코팅한 자기입자로 수지상세포를 모방해 T세포를 자극하는 것이다. T세포 증식 효과는 컸지만 질병을 일으키는 세포를 찾아내는 능력은 약했다. 암세포는 면역세포의 공격을 이리저리 잘도 피한다. 원래 건강한 세포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조금만 모양을 바꿔도 면역세포가 정상 세포로 오인해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10년 전 암세포 표면에만 있는 항원 단백질을 T세포가 놓치지 않도록 아예 유전자를 바꾸는 방법을 개발했다. 독성을 없앤 에이즈 바이러스에 암세포의 항원과 결합하는 수용체를 만들 유전자를 끼워넣고 T세포에 감염시켰다. 이제 T세포 표면에는 암세포 항원 수용체가 자라났다. 이것을 다시 환자 몸 안에 집어넣으면 대대손손 T세포가 암세포만 골라냈다.

과도한 면역반응 제어가 관건

펜실베이니아대 칼 준 박사 연구진은 2010년 백혈병 말기 환자에게 이렇게 유전자를 변형한 10억개의 CAR-T세포를 주입했다. 면역반응이 급격하게 일어나면서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완치됐다.

말기 백혈병 환자를 치료했다는 논문이 발표되자 제약바이오 업계에는 CAR-T세포 붐이 일었다. 펜실베이니아대는 노바티스에 기술을 이전해 소아 백혈병 치료제로 개발했다. 기존 치료제로는 1년 뒤 환자 10%가 생존했지만, T세포 치료제를 주사하면 생존율이 62%로 치솟았다. 프랑스 셀렉티스는 화이자와, 카이트 파마는 암젠과 함께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미국의 주노 테라퓨틱스는 프레드 허치슨 암연구센터와 손을 잡았다. 물론 상용화의 걸림돌도 있다. 약효가 개인마다 다르고 면역반응이 과도해지는 부작용이 있다. 지난해 주노 테라퓨틱스와 카이트 파마의 임상시험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주노 연구진은 부작용을 막기 위해 T세포가 정상 세포와 만나면 공격력을 내지 못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 퍼듀대 연구진은 T세포와 암세포 사이에 일종의 중간지대인 어댑터를 부착했다. 어댑터만 바꾸면 다양한 항원을 인식할 수 있고, 20분 정도만 있으면 어댑터가 분해돼 면역반응이 과도해질 가능성도 차단한다는 원리다. 서울대 정준호 교수의 기술을 이전받은 바이오벤처 앱클론도 T세포의 공격력에 일종의 안전 스위치를 추가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국내에서도 제약사-벤처 연계 활발

최근에는 혈액암 외에 유방암과 췌장암 같은 암도 T세포로 치료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녹십자 계열사인 녹십자셀은 간암과 췌장암, 대장암에 CAR-T세포 치료를 적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녹십자셀은 툴젠과 함께 첨단 유전자 편집 기술인 유전자 가위로 T세포에 필요한 유전자를 넣는 연구도 시작했다. 유한양행은 앱클론과 손을 잡았고, 보령제약은 바이젠셀과 함께 T세포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