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5일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가 이사 갈 전주 혁신 도시(전북 전주시 덕진구)의 신사옥. 그 옆엔 잡초가 무성한 1만여 평(3만6453㎡) 규모의 공터가 있다. 전북도청이 '연기금 특화 금융타운'을 조성한다고 작년 3월 157억원을 주고 매입한 땅이다. 기금운용본부가 옮겨오면, 증권사·자산운용사 등 금융사들이 대거 사무실을 낼 테니 건물을 지어 분양하겠다는 계산이다. 현지에서 만난 공인중개사 A씨는 "기금운용본부가 내려오니 증권사나 자산운용사 200여 개가 따라올 것이란 소문이 퍼지면서 집값에 도움이 될 것이란 말이 나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간 금융회사들은 "김칫국부터 마신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형 증권사 고위 임원은 "전주나 익산 시내에 있는 지점에 임시 사무실을 하나 두고 직원들을 오가게 하면 되지 임차료나 인건비를 들여 사무실을 낼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외국인 투자자 발길 끊어질라"

기금운용본부 안팎에선 전주 이전으로 글로벌 네트워크가 약해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작년 말 기준 전체 기금 555조원 중 27%인 약 150조원을 해외에서 굴리고 있다. JP모건·블랙록·모건스탠리 등 세계 굴지의 투자은행(IB)·자산운용사 등에 돈을 맡겼다. 최근까지 매달 평균 200명 안팎의 외국인이 유망 투자처를 제안하러 해외에서 서울로 온다. 그런데 기금운용본부가 새로 둥지를 틀 전주 혁신 도시는 서울에서 차로 왕복 5시간 거리다. 외국인들은 한국에 한번 오면 적어도 4~5곳의 투자 관련 기관과 회의를 하는데, 전주에 오려면 길에서 최소 5시간을 허비하게 돼 일정상 기금운용본부는 들르지 않으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555조원 굴리는 본부가 황야에 덩그러니… - 국민 노후 자금 555조원을 굴리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가 이사 가는 전주 혁신 도시. 맨 오른쪽 건물이 국민연금공단 본사, 오른쪽 둘째 건물이 기금운용본부 건물이다. 주변 땅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채 잡초만 무성하다.

세계 10대 연기금 중 국민연금을 제외한 9곳이 모두 각국의 수도나 금융허브에 기금운용본부가 있다. 글로벌 자본 시장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것이다. 세계 1위 규모인 일본 공적연금은 본사가 도쿄이고, 세계 4위 네덜란드 공적연금(ABP)도 본사는 남부의 헬렌이란 도시에 있지만 기금을 굴리는 자회사 APG는 암스테르담에 있다. 캐나다 공적연금도 금융허브인 뉴욕·시카고와 가까운 토론토에 자리 잡았다.

기금운용본부가 '논두렁 본부'가 될 처지에 놓인 것은 정치권의 입김 때문이다. 2012년 대선 당시 여야가 전북 지역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기금운용본부 전주 이전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것이 발단이 됐다. 이후 2013년 6월 말 국민연금법이 개정돼 전주 이전이 확정됐다. 정치권과 전북도 등은 기금운용본부가 서울사무소도 낼 수 없도록 막아 놓은 상태다.

투자 베테랑들 줄사표

전주 이전을 앞두고 기금운용본부에서는 '줄사표' 사태가 벌어졌다. 작년에만 30명이 회사를 관뒀고 올해에도 이미 20명 이상이 떠났거나 사의를 밝혔다. 기금운용본부장 다음 '넘버2'인 운용전략실장이 작년에만 두 번 바뀌었을 정도다. 올해 안에 계약이 끝나는 펀드매니저들도 50명에 달해 사표가 상반기 내내 이어질 것이란 말이 나온다. 전주로 이전한 후에는 새로 사람을 뽑기도 쉽지 않다는 걱정이 크다.

국민연금은 현재 세계 3위인 555조원 규모다. 80년대 후반부터 연금 가입자를 사실상 전 국민 대상으로 확대하면서 기금이 다른 나라에 비해 빠르게 늘어났다.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선진국은 전 국민 대상 연금이 아니라 직업별 연금 등 다양한 제도를 활용하고, 현재 일을 하는 세대가 낸 보험료를 은퇴한 사람들에게 바로 지급하는 '부과 방식'을 쓰는 경우도 많아 국가 경제 규모에 비해 적립액이 상대적으로 적다. 국민연금은 2031년부터는 거둬들이는 보험료보다 연금 지급액이 더 많아진다. 적극적인 투자로 수익률을 끌어올려 국민 노후 자금을 불릴 수 있는 시간이 약 15년 남았다는 뜻이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남은 15년간은 수익률을 최대한 올려야 하는 정말 중요한 시간이라 내부적으로는 '골든 타임'이라고 부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