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와 매니큐어, 샴푸, 담뱃갑 속지…. 서로 전혀 상관없는 듯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펄(Pearl)'이 들어간다는 것. 펄은 영어 단어로 '진주'라는 뜻이지만 화학업계에선 '안료(顔料)'의 한 종류로 부르는 전문용어다.

펄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뭔가 반짝인다면 그건 펄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피부에 바르는 로션, 먹는 마카롱, 지폐 글자와 숫자 등에 펄이 쓰인다. 펄은 이처럼 용도와 활용성이 무궁무진하다. '안료의 꽃'으로 불리는 이유다.

빛 굴절률에 따라 다양한 색깔 표현

안료(顔料·Pigments)란 염료와 달리 물이나 기름에 녹지 않는 분말 형태 착색제를 말한다. 주로 자연 추출물이나 화학·금속 성분으로 만들며 다양한 색깔을 표현하는 페인트·잉크 등을 만드는 데 쓴다. 이런 안료 중에서 반짝이는 효과를 내는 기능성 안료가 요즘엔 고부가 가치 제품으로 주목을 받는다.

일반 안료는 빛을 그대로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성분 그대로 색깔만 보여준다. 하지만 기능성 안료는 빛을 반사시켜 반짝이는 화려한 빛깔을 구현한다. 기능성 안료 중에선 알루미늄을 원료로 하는 '금속성 안료'가 있지만, 금속성 안료는 체내에 들어가면 배출되지 않고 쌓이기 때문에 인체에 유해하다. 이 때문에 노트북 외관 등 가전제품에 주로 쓰인다. 또 빛을 모두 반사하기 때문에 알루미늄 고유색인 '은색'만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펄'은 다르다. 펄은 인체에 해롭지 않고 무지개 색깔을 반짝이면서 보여줄 수 있다. 펄은 화강암의 한 종류인 '운모(雲母·mica)'를 원료로 한다. 인도가 주 생산국인 운모는 물고기 비늘·조개 껍데기 등 자연 퇴적물이 쌓여 생성된 '무기질(미네랄)'로, 먹어도 체외로 자연 배출된다. 이 운모는 반투명한 색을 띠는데, 이 때문에 빛의 일부는 표면에서 반사되고, 일부는 투과한 다음 반사된다.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가시광선)의 색깔은 투과된 색의 보색(반대색)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펄'은 진주에서 보듯 보는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색깔을 드러낸다. 펄 제조업체들은 펄의 다양한 색깔을 연출하기 위해 운모에 산화철을 입히는데, 이 산화철의 두께를 달리하면 빛의 굴절률이 달라지면서 반사되는 색깔도 달라진다.

위조 방지·영구 인쇄 등에도 쓰여

펄은 원래 반짝이는 화장품 용기 같은 플라스틱, 자동차 강판 등 철제 광택 도색, 담뱃갑 속지와 껌 포장지처럼 종이 위에 반짝이는 인쇄 효과가 필요한 경우에 주로 쓰였다. 그러나 최근 '산업 자재에 색을 입히는 용도'에서 벗어나, 먹는 식품이나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 플라스틱 표면 영구 인쇄 등으로 용도가 다양해지고 있다.

밋밋하지 않고 반짝이는 마카롱을 봤다면 그건 펄을 입힌 것이다. 사탕·음료수 등에도 쓴다. 펄은 원래 자연에서 추출된 무기질(미네랄)이 원료라 인체에 무해하지만, 업체들은 여기에 멸균 처리와 위생 생산 공정을 더해 식용 허가를 받고 있다. 매니큐어·아이섀도 등 색조 화장품에만 주로 펄이 쓰였지만, 안전성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서 스킨·로션·파운데이션 등 피부 전체에 바르는 화장품에도 펄이 쓰인다.

최근에는 다른 기술을 결합해 색다른 용도로도 쓰이고 있다. 먼저 플라스틱에 레이저로 글자를 새기는 데 쓴다. 펄이 들어간 플라스틱 위에 레이저를 쏘면, 펄 입자 부분만 선택적으로 태워지면서 까만색 문자나 그림이 새겨진다. 플라스틱으로 된 자동차 부품이나 전자기기 부품 등에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도록 제품 정보를 새겨넣으려면 펄이 필요하다.

지폐나 공문서 위조 방지에도 펄이 쓰인다. 지폐의 숫자 같은 그래픽은 펄로 인쇄한다. 복제가 불가능한 특정 펄 제품을 사용해 전문가들만 정품 지폐를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자동차 백미러나 범퍼 같은 플라스틱 부품에 도료를 효과적으로 입히는 데도 펄은 유용하다. 자동차 업체들은 원래 자동차 강판에 도장할 때, 도료의 밀착력을 높이기 위해 전기를 흐르게 해 정전기를 일으키는 '정전 도장'을 한다. 그러나 플라스틱 부품은 전기가 흐르지 않기 때문에 정전 도장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펄의 원료인 운모의 입자는 넓적한 '판' 모양이라, 특수한 첨가제만 넣어주면 판들이 연결되면서 전기가 흐르는 성질을 띤다. 이런 원리를 적용, 백미러 등에 펄을 먼저 입힌 뒤 정전기를 일으켜, '정전 도장'이 가능하다. 장재훈 한국 머크 이사는 "지난 50여년간 펄은 주로 장식용으로 쓰였지만, 최근 5~10년 사이 펄의 용도가 크게 진화하고 있다"며 "미래에는 전파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는 펄이 개발, 휴대폰에 전화가 오면 휴대폰에 입혀진 펄 색깔이 바뀌는 걸 볼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