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회사까지 모두 규제할 필요 없어...상법보다 거래소 상장규정으로
-거래소가 독립 사외이사 선임 유도 등 일본 사례 도입 검토해야

# 일본은 도쿄증권거래소 상장규정으로 기업지배구조 코드(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를 2015년 6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상장기업들이 이를 채택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경우 채택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원칙 준수-예외 설명(comply or explain) 방식이다. 기업지배구조 코드는 이사회 등의 책무를 규정한 ‘기본원칙4’ 항목의 세부 조항으로 ‘독립 사외이사를 2명 이상 선임’하도록 명시했다.

# 2001년 미국의 거대 에너지 기업 엔론은 15억달러 규모의 분식회계를 저질러 결국 파산했다. 이후 회계 분야에서는 샤베인-옥슬리법을 제정해 회계감독위원회(PCAOB) 설립, 감사인 독립성 강화, 기업 책임 강화, 재무공시 개선 등을 추진했다. 이와 함께 뉴욕증권거래소(NYSE)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안을 마련해 상장회사 이사회는 독립이사(independent director)가 과반수 이상 되도록 하고 독립이사로 구성된 감사위원회, 이사선임위원회, 보수위원회를 설치하도록 의무화했다.

# 지난해말 민영화에 성공한 우리은행 이사회는 과점주주들이 추천한 사외이사 5명과 사내이사 2명, 예금보험공사 추천 비상임이사 1명 등 총 8명으로 구성돼 있다. 과점주주 쪽 이사들이 과반수를 넘는다. 과점주주 쪽 이사들은 당연히 과점주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경영진으로부터 독립돼 있기 때문에 경영진 견제 등 주주 권한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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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사외이사(outside director)’가 아니라 ‘독립이사(independent director)’다. 우리나라처럼 단순히 회사 바깥에 있는 교수, 회계사, 관료 출신 인사 등을 사외이사로 두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경영진으로부터 독립돼 있어 견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독립 사외이사가 있느냐, 없느냐가 기업지배구조에서 중요하다.

우리나라 오너나 경영진은 껄끄러운 독립 사외이사를 싫어한다. 경영간섭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 사외이사를 강제로 두도록 하는 제도적 방안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현재 국회에는 집중투표제 의무화, 상장회사 독립 사외이사 선임, 감사위원 분리 선출 등이 반영된 상법 개정안이 제출돼 있다.

그러나 기업들의 개별적인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 규제에는 기업들의 반발이 크다. 다른 이사들과의 충돌로 회사 운영이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현행 상법에서는 상장회사의 전체 이사 중 4분의 1 이상을 사외이사로 임명하도록 법으로 의무화했지만 형식적으로만 지켜지고 있다. 사후 감독할 주체도 마땅치 않다.

대부분 선진국에서는 법보다는 거래소 상장규정과 같은 연성규제를 활용한다. 거래소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상장회사들을 관리 감독한다. 우리나라도 법으로 의무화해 기업들을 규제하려 하기보다 정부가 거래소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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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엔론 사태 이후 벌어진 오라클 사건…“사외이사 독립성은 경제적 관계 뿐 아니라 사회적∙인간적 관계까지 따져야”

우리나라는 사외이사로 선임될 수 없는 결격사유를 상법에 규정함으로써 사전 규제로 사외이사들의 독립성을 확보하려고 하고 있다. 결격사유는 2년 이내에 해당 회사 업무에 종사했던 사람, 최대주주의 배우자와 직계 존비속, 최대주주인 법인의 직원, 회사 모회사 또는 자회사 직원, 회사와 거래관계 등이 있는 법인의 직원 등으로 구체화돼 있다.

일단 회사 바깥에 있는 사람이면 오너, 경영진의 친구이거나 추천대상자도 사외이사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사외이사에 대한 임명권이 오너나 경영진에 있는 상황에서 ‘독립성’을 갖추기 어려운 구조다.

반면 미국은 거래소 상장규정에 독립이사의 요건을 규정해 놓았지만 그에 더해 ‘이사가 독립적이었는지 여부’를 법원의 해석에 따라 사후적으로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판례를 보면, 독립이사는 회사와 이해관계가 없는(dis-interested) 사람이어야 한다. 오너나 경영진의 영향력 하에 있는 사람이면 당연히 안 된다.

일본도 상장사 절반 정도가 준수하는 기업지배구조 코드에 독립 사외이사를 2명 이상 선임하도록 했는데 독립 사외이사 역시 오너, 경영진이나 소액주주로부터 독립적으로 회사 전체를 위해 의사결정을 하도록 돼 있다.

여기에 더해 미국 델라웨어주 법원은 엔론 사태 이후인 2003년 사외이사의 독립성 판단에 대해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경제적 관계 뿐 아니라 사회적, 인간적, 감정적 관계까지 따져야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오라클의 이사들 중 4명이 2001년 회사 실적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알고 보유 주식을 내다 팔았다.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내부자 거래를 한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시티 오라클 파크웨이에 있는 미국 IT 기업 오라클(ORACLE) 본사.

일부 주주들은 주주대표 소송을 제기했다. 오라클은 델라웨어주 법률에 따라 특별소송위원회를 소집했고 위원으로 사외이사였던 가르시아 몰리나 교수와 조셉 그룬트페스트 교수를 선임했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같은 스탠포드대 교수였다. 특별소송위원회는 조사 후 법원에 주주대표소송을 기각해 달라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법원은 이를 배척했다. 이유는 위원회 멤버들에게 독립성이 결여돼 있다는 것이었다.

법원은 경제적 이해관계 뿐 아니라 사회적, 인간적 관계까지 따졌다. 법원은 두 교수가 오라클과 피고인 4명의 이사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받은 스탠포드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지위에 있다고 인정했다. 경제적 이해관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사회적, 인간적, 감정적 관계에서는 영향을 받았다고 봤다. 대표소송의 피고 중 한 사람인 보스킨 이사는 그룬트페스트 교수가 경제학 박사과정에 있을 때 그를 가르친 교수였다는 점, 그 후 학내외 다양한 활동을 통해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이 이사로서 독립성을 의심하게 할만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엘리슨 오라클 회장의 아들은 스탠포드대 입학허가를 받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두 교수가 스탠포드 커뮤니티에 주요 기부자인 엘리슨 회장을 두번 상처받게 하지 않으려 하는 잠재적 동기를 유발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지수 법과경영연구소 소장(미국 변호사)은 “오라클 사건으로 사외이사 독립성 판단 때 경제적 이해관계나 지위 보상 등을 따지던 것에서 사회적, 인간적 관계까지 판단하게 됐다”며 “지금은 다시 좀 후퇴한 상황이긴 하지만 독립성에 대해 엄격히 판단하는 경향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미국에 비하면 턱없이 못미친다. 지금이라도 사외이사의 독립성 기준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조명현 고려대 교수는 “형식적인 면 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독립성은 반드시 강화돼야 할 부분”이라며 “대기업 대부분이 계열사에 사외이사를 먼저 선정해 전달하는 구조가 고착화 된 우리나라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외이사 후보추천위원회가 적절한 인물을 충분히 탐색하고 검증하는 공정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법으로 획일적 규제 하기보다 거래소 상장규정으로 연성규제해야...거래소 역할 강화 ‘필수’

우리나라는 기업지배구조 개선 이슈에 대해 주로 상법 개정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번 20대 국회에도 상장회사에 대해 독립 사외이사 선임 강제, 감사위원 분리 선출,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상법 개정안 10여개가 제출돼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법으로 획일적 규제를 하기보다는 선진국처럼 거래소 상장규정과 같은 연성 규제로 기업들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기업들마다 규모, 업종이나 지배주주 지분율 등 각각 다른 환경에 있는데 모든 기업들에게 똑같은 지배구조를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종호 건국대 교수는 “모든 기업들에게 획일적 지배구조를 강요하면 형식적으로 법을 지키겠지만 ‘오너나 경영진에 대한 견제’라는 법 취지에 맞게 사외이사 제도 등이 운영되기 어렵다”며 “일본처럼 기업에게 기업지배구조 모범 규준를 준수할지에 대해 선택권을 주고 공시를 통해 시장에서 평가 받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기업들을 개혁의 대상으로 볼 게 아니라 함께 논의하고 설득해서 같이 가야할 동반자로 삼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은태 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장은 “법이라는 강성 규제로 해놓았는데 제도가 법 취지에 맞게 운영되는지 누가 감시 감독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검찰이 할 것도 아니고, 금융위가 할 수도 없다. 연성 규제로 한다면 공공기관인 거래소보다 더 나은 곳이 없다”고 설명했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한국거래소 전경.

거래소가 기업지배구조와 관련해 제대로 일을 하려면, 정부가 거래소에 힘을 실어줘서 선진국처럼 거래소의 기능과 역할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이지수 소장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에서 거래소가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우리나라 거래소는 매출이나 이익 등 재무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많은 사고들이 기업지배구조에서 발생하고 있는 만큼 거래소가 지배구조 감시 체제를 제대로 갖추고 실행력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 소장은 “우리나라 거래소도 상장 단계에서 지배구조를 살펴보고 상장 이후에도 2년마다 점검하긴 하지만 그걸 강제할 메커니즘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며 “상장폐지나 경고 등 조치로 기업들을 압박하면서 바람직한 쪽으로 기업지배구조를 확립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 차원에서 거래소가 힘을 받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거래소도 이같은 분위기를 반기고 있다. 이은태 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장은 “일본에서 아베 정부는 주주 이익 보호,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관련해 거래소를 주요 파트너로 삼았다”며 “기업지배구조 관련 법률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실제 취지에 맞게 집행이 어떻게 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일본에서는 거래소가 회사로 하여금 계속 깨어있도록 똥파리 역할을 잘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본부장은 “우리 거래소도 그런 역할을 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거래소 상장규정 등 연성규제 쪽으로 정책 중심을 바꾸고 기업들과 함께 (기업지배구조 개선)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