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국내 제약업계 순위가 뒤바뀌었다. 관절염 치료제 ‘케펜텍’으로 유명한 제일약품이 5947억원의 깜짝 매출을 올려 종근당을 끌어내리고 매출액 기준 ‘톱 5’에 올라선 것이다. 제일약품 위로는 한미약품, 유한양행, 녹십자, 대웅제약밖에 없었다.

1957년 설립된 제일약품의 승승장구 비결은 탄탄한 병원 유통망에 있다. 이 회사는 다국적 제약사의 전문의약품(ETC)을 주로 수입해 판매하며 매출을 끌어올렸다.

제일약품은 2015년 10월 자사의 대표 캐릭터인 ‘펭귄’ 캐릭터를 리뉴얼한 관절염 치료제 ‘케펜텍’ 광고를 선보였다.

주목할 점은 최근 제일약품이 급격한 지배구조 재편에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지배구조 재편의 중심에는 제일헬스사이언스 신임 대표로 선임된 한상철(41) 제일약품 부사장이 있다. 한 부사장이 대표이사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 부사장은 제일약품 창업주인 고(故) 한원석 회장의 손자이자 한승수(70) 회장의 장남으로 ‘오너 3세’다. 그는 연세대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로체스터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한 뒤 한국화이자제약과 한국오츠카제약 등 다국적 제약사에서 근무하며 제약업계 경험을 쌓았다. 2007년 제일약품에 입사해 마케팅본부 상무, 경영기획실 전무 등을 역임한 뒤 2015년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한 부사장은 지난해 말 설립된 제일헬스사이언스를 이끌며 일반의약품(OTC) 매출을 끌어올리는 과제를 맡았다. 제일헬스사이언스는 일반 약국에서 의사의 처방 없이 판매하는 약을 유통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고 있다.

그동안 제일약품(271980)은 전문의약품 판매 비중이 높았고 일반의약품 판매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한 부사장이 제일약품의 히트 일반의약품인 ‘케펜텍’의 뒤를 이을 제품을 발굴해 흥행시키면 경영 승계의 첫 시험대를 무난히 통과할 것으로 보인다.

◆ 제약업계 지주사 전환 바람 ‘막차’ 타는 제일약품

제일약품은 50년이 넘도록 단일 지배법인 체제였다. 제일약품은 일본 오츠카제약과 합작으로 설립한 ‘제일오츠카제약(현 한국오츠카제약)’, 중국 야오제약과 만든 ‘제일야오제약’에 각각 22.5%, 50.0%의 지분을 투자한 게 전부였고 따로 계열사를 두지 않았다.

제일약품의 지배구조가 요동친 것은 지난해 11월이다. 제일약품은 단순 물적분할을 통해 OTC 사업만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제일헬스사이언스(비상장법인)를 신설했다. 그 다음달인 지난해 12월에는 제일약품 영업부 출신들로 구성된 의약품 판매대행(CSO) 사업을 맡는 제일앤파트너스(비상장법인)도 새로 만들었다.

또 올해 1월 16일에는 공시를 통해 지주회사 체제 전환을 공식 천명했다. 제일약품은 회사를 인적분할해 ETC 사업을 담당할 신설회사(사업회사)와 투자 부문을 담당할 존속회사(지주회사)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신설회사는 제일약품이라는 이름으로 ‘재상장’하게 되며, 존속회사는 제일파마홀딩스(가칭)라는 이름으로 ‘변경상장’하게 된다.

제일약품이 이처럼 긴박하게 움직이는 것은 지주사 전환을 통해 ‘오너 2세’ 한승수 회장 → 제일파마홀딩스 → 제일약품, 제일사이언스, 제일앤파트너스의 지배구조 체제를 갖추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제일약품은 동아쏘시오그룹처럼 ‘지주사(제일파마홀딩스)-전문의약품 사업(제일약품)-일반의약품(제일헬스사이언스)’ 등 3개 부문으로 분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지주사 전환을 하더라도 오너 3세인 한상철 부사장까지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일약품 보유 지분율이 5%도 안되는 한상철 부사장이 분할되는 2개 회사인 제일파마홀딩스(존속법인)과 제일약품(신설법인)의 지분을 늘리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제일약품은 지난해 10월 31일 회사가 영위하는 사업부문 중 일반의약품 사업부문을 상법상 단순 물적 분할하는 분할계획서를 승인받기 위한 제57기 임시주주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임시 주주총회를 통해 한상범 부사장이 일반의약품 사업만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제일헬스사이언스 대표에 올랐다.

제일약품은 오는 4월 27일 임시 주주종회를 거쳐 6월 1일 지주사인 제일파마홀딩스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제일약품은 최대주주인 한승수 회장과 한상철 부사장을 포함한 특수관계인 최대주주 측 지분율(45.99%)이 50%에 가까워 소액주주가 반대한다 하더라도 인적분할을 통한 지주사로의 체제 전환은 원활하게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제일약품의 자사주 비율이 14.23%에 달하는 점도 지주사 체제 전환에 유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제일약품이 인적분할되면 제일파마홀딩스가 보유 중인 자사주 비율만큼 제일약품의 신주를 배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추가로 6% 정도의 지분만 확보하게 되면 지주사 행위 제한 요건(상장사 지분 20% 이상 보유)을 충족시킬 수 있다.

제일약품이 급작스레 계열사를 신설하고 회사를 분할하는 것은 올해 7월 지주회사 자산 기준요건이 강화되기 전에 지주회사 전환 작업을 마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오는 7월부터 지주사 자산총계 규정을 1000억원에서 5000억원으로 확대한다. 제일약품의 지주사 역할을 담당할 제일파마홀딩스의 지난해 3분기말 기준 자산총계는 973억원밖에 안된다. 자산총계 규정이 확대되면 지주사 요건을 갖추기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또 ‘지배구조 개편의 마법’이라고 불리는 인적분할에 대한 규제 움직임 때문에 제일약품이 회사 개편을 서둘렀다는 분석도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인적분할시 자사주에 신주 배정을 금지하는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박영선 의원도 자사주에 신주를 배정할 경우 양도손익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과세하는 법인세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대해 제일약품 관계자는 “인적분할을 통한 지주사 체제 전환과 관련해 4월말 열리는 임시 주총이 무난하게 통과돼 6월 1일 제일파마홀딩스가 공식적으로 출범해도 공정위로부터 지주사 전환 요건과 관련한 심사에 1달에서 1달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경우 제일파마홀딩스의 지주사 승인은 7월 이후에 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제일파마홀딩스는 상향된 자산 기준인 5000억원에 맞춰 지주사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서울 및 부산 사옥 등 보유 중인 부동산의 자산 재평가 등을 실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제일약품 본사 전경

◆ 신설 ‘제일헬스사이언스’ 수장 맡은 오너 3세…일반의약품 사업 강화 전략은

제일약품의 매출의 대부분은 전문의약품에서 나오고 있다. 2015년 기준 매출 5947억원 중 일반의약품 사업부에서 349억원의 매출을, 전문의약품 사업부에서 5598억원의 매출을 기록했을 정도로 전문의약품 매출 비중이 압도적이다. 2016년도 마찬가지다. 전체 매출 대비 전문의약품 비중이 90%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문제는 제일약품의 전문의약품 매출 대부분이 ‘상품매출’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상품매출이란 다국적 제약사 등 다른 제약사가 만든 약을 포장만 바꿔 파는 것을 말한다.

제일약품은 특히 다국적 제약사 화이자로부터 ‘리피토정(고지혈증 치료제)’, ‘리리카캡슐(통증 치료제)’, ‘쎄레브렉스 캡슐(소염 진통제)’ 등을 도입해 판매하는 데 이 3개 의약품의 매출액이 1765억2937만원으로 전체 상품매출의 54.7%를 차지한다(2016년 3분기 기준).

다만 ‘관절엔 펭귄이 제일’이라는 광고로 유명한 제일약품의 관절염 치료제 케펜텍은 2015년 기준 138억원의 매출(전체 매출 대비 비중 2.32%)을 기록하며 블록버스터급 일반의약품에 이름을 올렸다. 일반의약품이자 파스류인 ‘제일파프(소염 진통제)’도 인지도가 높은 제품이다.

제일약품이 지난해 제일헬스사이언스를 신설하면서 오너 3세인 한상철 부사장을 초대 수장으로 앉힌 것은 케펜텍이나 제일파프를 잇는 일반의약품의 히트 상품을 만들어 보라는 주문으로 해석된다. 한 회장의 장남인 한 부사장이 경영 능력을 평가받는 시험대에 올랐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한 부사장이 기존에 취약한 일반의약품 사업을 진두지휘하며 해당 사업부문을 육성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며 “일반의약품 성과에 따라 경영권 승계와 후계자 지배력 강화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제일약품 연구원이 의약품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 지난해 3분기 기준 제일약품 전체 매출액 대비 R&D 비중은 3.6%다.

◆ 경영권 승계 과정의 불협화음 가능성 적어…낮은 지분율·이익률은 극복해야 할 과제

제일약품은 과거 한승수 회장이 경영권을 확고히 하는 과정에서 형제 간의 불협화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 회장이 압도적으로 제일약품 지분을 확보하게 되면서 이같은 갈등은 봉합됐고 제일약품은 안정적으로 장남 승계 구도를 확립하게 됐다.

제일약품은 한 회장이 지난 2011년 대표이사 자리를 내놓으면서 3세 경영체제 준비에 들어갔다. 한승수, 성석제 공동 대표이사 체제에서 성석제 단독 체체로 전환하면서 한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반면 한 회장의 장남인 한 부사장이 당시 경영기획실 전무로 경영 전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한승수 회장의 장남인 한상철 부사장은 형제 중에서 가장 많은 제일약품 지분을 갖고 있는 데다 회사 경영에 직접 참여하고 있어 경영권 승계에 가장 유리한 고지에 있다”면서 “형제 간 다툼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상철 부사장의 동생인 한상우씨는 일반 회사에 다니고 있고, 여동생인 한보은씨는 주부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상우씨와 한보은씨는 각각 제일약품 지분 1.22%, 0.37%를 보유하고 있다.

경영승계 1순위인 한상철 부사장의 단기 과제가 제일헬스사이언스를 안착시키는 것이라면,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안정적으로 제일약품의 지분을 확보하는 것과 제일약품의 낮은 영업이익률을 끌어올리는 것은 그의 중장기 과제가 될 전망이다.

한 부사장의 제일약품 지분율은 4.66%. 그가 지분을 늘릴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한 부사장이 장내에서 지분을 매입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인적분할 이후 제일파마홀딩스 지분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통상적으로 한 기업이 지주회사와 사업회사로 인적분할되는 경우 지주사 기업가치가 저평가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한 부사장의 아버지인 한 회장이 보유 중인 주식을 증여받는 방법이다. 하지만 엄청난 금액의 증여세를 납부해야 한다는 부담을 한 부사장이 안게 된다.

마지막으로 인적분할 이후 한 부사장이 보유 중이 제일약품 주식을 제일파마홀딩스 자사주와 맞바꾸는 방법도 고려해볼 수 있다. 이 경우 한 부사장의 제일약품에 대한 지배력은 악화되지만, 제일파마홀딩스에 대한 지배력의 강화하게 된다.

제일약품의 영업이익률을 높이는 것도 한 부사장이 장기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제일약품은 또 전체 매출에서 화이자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보니 ‘제일약품은 화이자를 빼면 시체’라는 비판도 업계에서 나온다.

화이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다 보니 제일약품은 수익성도 더 나빠지고 있다. 2015년 제일약품의 영업이익률은 2.2%로 업계 최하위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난해 3분기 기준 영업이익률은 1.2%로 1.0%포인트나 하락했다. 지난해 3분기 기준 제일약품의 전체 매출액 대비 R&D 비중은 3.6%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