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의 농장에서 농민 권오영씨가 뉴질랜드 품종인 엔비 사과를 수확하고 있다. 달고 아삭한 식감이라 젊은 소비자층에서 특히 반응이 좋다.


22일 오후 이마트 서울 용산점 설 선물 특설 매장. 판매 사원이 뉴질랜드 품종 사과 엔비(Envy)를 측정기에 올리자 당도(糖度)가 15.8브릭스(Brix)로 나타났다. 브릭스는 당도의 단위로 높을수록 당도가 높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일반 사과의 평균 당도가 12~13브릭스이고, 당도가 높은 품종인 '후지' 사과도 14브릭스 정도다. 엔비 사과는 후지보다 약 20% 비싼 가격에 판매됐지만, 소비자들은 생소한 외래종 사과 매대 앞에 몰렸다. 같은 날 현대백화점 서울 압구정 본점에도 엔비 사과 선물 세트가 진열돼 있었다. 한시적으로 소량 판매되던 엔비 사과가 백화점의 공식 선물 세트로 편성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엔비 사과는 일반 사과보다 다소 작고 단단해 한눈에 튀지만 결코 수입 과일이 아니다. 충남 예산의 200여농가에서 직접 재배한 '우리 과일'이다.

◇뉴질랜드 사과, 중국 멜론, 네덜란드 배…

국내 농가에서 재배된 외래 품종 과일들이 잇따라 시장에 출시되고 있다. 국내 소비자들의 입맛이 다양해진 데다 수입하는 대신 외래종을 국내에서 재배하면 품질·선도 면에서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엔비 사과의 경우 뉴질랜드로부터 품종을 수입해 2012년부터 국내에서 키우기 시작했다. 2013년 약 5t 분량을 수확하는 데 성공했고, 지난해엔 1200t을 수확했다. 엔비 품종을 수입하는 에스티아시아의 김희정 대표는 "달고 단단한 식감이라 젊은 소비자층에서 반응이 좋은데 4년여 만에 국내 재배 면적이 전체 사과 재배 면적의 0.5% 수준인 150만㎡로 늘었다"고 했다. 충남 예산에서 엔비 사과를 재배하는 권오영 농민은 "매출의 10% 정도를 뉴질랜드에 로열티로 지불해야 하지만, 재배가 일반종보다 쉽고 소비자들의 관심도 높아져 재배 농가 소득이 늘고 있다"며 "내년에는 중국·싱가포르·일본 등으로 거꾸로 수출을 할 계획도 있다"고 했다.

중국에서 '황제의 과일'로 불리는 하미과(哈密瓜) 역시 경북 성주 3개 농가에서 재배되고 있다.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가 주산지로 하미과는 멜론의 일종으로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맛이 강하다. 2014년 하미과 모종을 심은 이명재씨는 원래 참외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씨는 "참외가 50대 이상은 즐기지만 어린이들은 별로 선호하지 않아 고민을 했었다"면서 "소비자들의 변화를 무시하면 10~20년 뒤에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아 해외 품종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하미과 국내 매출은 30억원 수준이었다. 이씨는 "고급 멜론 시장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어 매출은 계속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생산자도 소비자 입맛 따라 변해야 산다"

네덜란드가 원산지인 서양 배 '스위트센세이션'도 충남 아산에서 재배 중이다. 배도 사과와 마찬가지로 수입이 금지된 품목이다. 지난 2014년 충남 아산의 4개 농가에 처음 식재됐고, 지난해 15㎏ 10박스 물량을 수확하는 데 성공했다. 본격 상업적 생산은 2019년에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스위트센세이션은 배에서 사과 향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체리와 자두를 교잡한 '나디아 자두'도 호주에서 들여온 품종으로 자두 식감에 체리 맛이 난다. 나디아 자두는 경기 안성과 경남 거창에서 재배 중이다. 수입 품종 채소의 재배도 늘고 있다. 지난해 제주도 농가에선 특수 채소인 '펜넬'(미나리의 일종)을 심어 상품화 테스트를 마쳤고, 방울양배추 '케일'을 교접한 신종 채소 '케일렛'도 시범 재배 중이다. 손정익 서울대 교수(한국원예학회장)는 "예전엔 얼마나 많은 농가가 생산하느냐에 따라 가격이나 시장 인기 품목이 결정되는 구조였다면 지금은 소비자들의 바뀌는 입맛을 먼저 잡는 농가가 생존하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면서 "국내 과수 농가의 경쟁력을 위해서라도 시장의 변화에 맞게 새로운 품종과 농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한국화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