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물가하락과 그로 인한 경제 활력 감소)은 중앙은행의 통회량 축소 때문이라는 이전 생각을 바꿨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양적완화(QE·중앙은행이 민간에 통화를 직접 공급하는 정책)가 아니라 과감한 재정확대만이 해결책입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 '아베노믹스'의 설계자인 하마다 고이치(浜田宏一)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는 2016년 12월 일종의 '전향 선언'을 했다. 자신이 주창한 '중앙은행의 과감한 돈 풀기를 통한 디플레이션 탈출'이라는 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그는 이를 다룬 니혼게이자이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정부 부채 규모는 주요 선진국 가운데 최악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정부 채무와 중앙은행의 부채인 화폐 발행액은 국가 전체로 보면 민간 부문의 자산이기도 하다"고 응수했다. "빚은 미래에 그대로 이전한 뒤, 경기가 회복되면 세수를 늘려 갚아나가면 된다"는 게 하마다 교수의 설명이다. "리카도 대등정리(Ricardian equivalence theorem)는 적자 재정에 따른 국채 발행이 미래 소비를 위축시킬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먼 미래를 보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마다 명예교수의 '전향'은 최근 경제학계에 불고 있는 '케인스 부활' 기류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꼽힌다. 실제로 하마다 명예교수는 아예 '케인스의 부활(Keynes Reborn)'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정부의 부채 상환 능력에 대한 과도한 우려가 민간 부문에서의 지출을 꺼리게 하고 있다"며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 정책이 실패한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케인스의 생각은 '일반이론'이 발간된 지 40년 뒤 반혁명(counterrevolution·1970년대 신고전파 경제학의 득세를 의미)이 일어나 강한 비판을 받았지만, 40년이 다시 지난 뒤 '새 부대(new bottle)'에 담겨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 "재정정책 없는 양적완화는 경기침체 강화"
하마다 명예교수가 전향을 결심하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는 201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크리스토퍼 심스 미 프린스턴대 교수가 주도하는 '가격 수준에 대한 재정 이론(FTPL·fiscal theory of the price level)'이 있다. 심스 교수는 토머스 사전트 교수와 함께 거시경제 분석 방법을 개발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1990년대 중반부터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의 상관관계에 주목해 비전통적 거시경제 이론인 FTPL을 개발해왔다. 이 이론은 통화량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과 금융시장에서 결정된다는 기존 화폐이론과 달리 정부의 재정정책이 통화량의 핵심 변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중앙은행의 정책 결정은 정부의 재정 정책과 분리될 수 없다.
FTPL은 2016년 8월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린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연례 콘퍼런스에서 심스 교수가 '재정정책, 통화정책, 중앙은행 독립성'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주류 경제학 내부에서도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 보고서에서 심스 교수는 "정부의 국채 상환 능력이 안정적인 상황에서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추고 채권을 매입하면 그만큼 국채의 미래 가치가 높아지게 된다"며 "이 때문에 민간 부문은 소비와 투자를 줄이고 국채를 매입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초저금리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완화적 통화 정책은 역으로 민간 지출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낳는다"는 게 심스 교수는 지적했다. "이러한 문제는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해도 똑같이 발생할 것"이라면서 "재정정책 없는 통화정책은 별반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게 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통화 정책 무용론'을 주장하는 학자는 심스 교수만이 아니다. 고티 에거트슨 브라운대 교수는 2016년 5월 전미경제학회보(AER·American Economics Review)에 게재된 '개방 경제의 구조적 장기침체'란 제목의 논문에서 통화정책이 여러 나라의 초저금리 경쟁을 부추겨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설명했다. 에거트슨 교수는 수출 수요 부진과, 자본 유입으로 인한 환율 변동에 직면한 각국 중앙은행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초저금리 정책을 편다는 얘기다. 문제는 한 나라가 초저금리 정책으로 자국 화폐 가치를 낮추면, 다른 나라도 이에 대응해 금리를 낮추게 된다는 것이다. 에거트슨 교수는 "통화정책이 촉발하는 부정적 외부성(negative externality)을 고려하면, 한 나라의 통화정책 효과는 애초 예상보다 훨씬 줄어든다"고 결론을 내렸다.
◆ IMF 前 수석이코노미스트 "국채 발행 통한 공공투자가 민간보다 더 효율적일 수도"
올리비에 블랑샤 미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교수는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 공공정책에 쓰는 게 민간이 금융시장에서 채권을 발행해 자율적으로 투자에 나서는 것보다 효율적일 수 있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IMF(국제통화기금) 연례 콘퍼런스에서다. 블랑샤 교수는 IMF 수석이코노미스트를 맡기도 했던 거시경제학계의 핵심 이론가 가운데 한 명이다. '대불황 이후 거시경제학'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콘퍼런스에서 블랑샤 교수는 초저금리 상황이 장기화되는 원인과, 그에 대한 정책 처방에 대해 발표했다. 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에서 자본을 빌리는 대가로 지불하는 이자율은 경제성장율보다 높아야한다. 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초저금리로 이자율이 경제성장율을 밑도는 현상이 몇 해째 지속되고 있다.
블랑샤 교수는 자본의 한계생산성(marginal productivity of capital·자본을 추가로 투입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산출물의 양)이 경제 전체의 성장률보다 낮게 유지되는 현상에 주목했다. 경제 전체가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국면이 지속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 때 정부의 과감한 재정지출은 거시 경제가 일종의 '늪' 같은 침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외부 동력이 된다. 또 이자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세금을 걷는 것보다 국채를 발행해 돈을 빌리는 것이 효율적이다. 경제성장률이 이자율보다 높기 때문에, 이자부담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랑샤 교수는 "이 경우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는 게 민간 금융시장보다 좀 더 싼 값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 정책의 효율성이 크게 높아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