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최대 번화가 신주쿠(新宿)에서 남쪽으로 6㎞쯤 떨어진 다이칸야마(代官山)는 ‘최신 유행의 출발지, 고급 주택가와 대사관이 모여 있고 조용히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2000년대 초반부터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컬처컨비니언스클럽(CCC)’은 2011년 12월 이 동네에 쓰타야서점(蔦屋書店)을 열었다. 오프라인 서점의 위기 속에서도 쓰타야서점은 승승장구했다. ‘라이프 스타일을 파는 서점’으로 불리며 월 1억엔(한화 10억3000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쓰타야서점은 도쿄의 명소로 떠올랐다.

‘드디어 쓰타야서점에 가는구나!’ 들뜬 마음을 안고 지난해 12월 26일 다이칸야마로 향했다. 신주쿠역에서 JR야마노테선(山手線·서울의 지하철 2호선처럼 도쿄를 순환하는 전철)을 타고 세 정거장 이동한 후 시부야(渋谷)역에 내려 1㎞가량 걸으면 쓰타야서점이 나온다. 이 동네는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나무가 많고 조용해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서울 성북동을 연상케 하는 모던한 스타일의 주택들을 지나 15분 정도 걷다보니 알파벳 T(쓰타야의 영문 표기는 ‘Tsutaya’)를 수천 개 늘어놓은 듯한 독특한 외관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쿄 다이칸야마에 있는 쓰타야서점 외관.

◆ 독특한 아우라 쉼과 여유가 있는 곳

다이칸야마 쓰타야서점은 일본을 방문한 영국 왕세손 부부, 덴마크 왕과 왕비가 자유 일정 때 유일하게 찾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입구에 도착하자 궁금증이 더 커졌다.

서점은 총 3개 건물(부지 규모 1만3200㎡·4000평)로 이뤄져 있었다. 야자수 두 그루 사이로 난 3관(건물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측면 출입구로 들어가자 미식의 나라답게 요리 서적 코너가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았다. 수백 권의 알록달록한 요리책·잡지, 미슐랭 마스코트인 ‘비벤덤(Bibendum)’ 아래에 쌓여 있는 미슐랭 가이드, 3~4m 높이의 원목 책장, 한 켠에 놓인 접시들이 묘한 아우라를 자아냈다.

쓰타야서점 평면도. 세 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으며 각 건물은 구름 다리로 연결돼 있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여행 서적 코너와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가 경계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었다. 평일 오전임에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여행책이나 잡지를 읽다가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싶다면 바로 옆 여행사 부스에서 곧바로 상담할 수도 있었다.

2층 분위기는 더 여유로웠다. 통유리를 사용해 자연 채광이 이뤄지도록 했고, 유리 벽면을 따라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어 편안하게 책을 볼 수 있었다. 은은한 조명과 포근한 분위기 때문에 ‘몇 시간이고 머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름다리를 건너 2관으로 넘어가면 서재 분위기로 꾸며진 ‘안진 라운지(Anjin lounge)에서 식사와 커피, 주류를 즐길 수도 있다. 정신없이 바쁜 서울 대형 서점과는 완전히 달랐다.

쓰타야서점 3관 2층. 통유리벽을 따라 마련된 좌석에서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

이런 편안함과 여유는 쓰타야서점의 핵심 경쟁력이다. 이날 마주친 한 한국인 관광객은 “잠깐 들렀다 가려고 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며 “일정을 조율해 더 쉬었다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북 큐레이터이자 한양문고 마두점장인 오서현씨는 “쓰타야서점은 오프라인 공간 창조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며 “누구든지 와서 편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삭막한 디지털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찾던 공간”이라고 했다.

◆ "꿈을 팔아라"고도로 계산된 '우연의 미학'

방문객의 무장을 해제하는 기술에 감탄하긴 아직 이르다. 쓰타야서점을 일본 오프라인 서점 매출 1위에 올려 놓은 마케팅 전략은 따로 있었다. 카테고리 숫자를 줄이고 깊이를 더한 진열 방식, 고도로 계산된 상품 추천 기법 등을 활용해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

쓰타야서점에 진열된 음악 앨범들과 아기자기한 표지의 책들. 통유리벽을 따라 마련된 공간에서 앨범을 골라 들어볼 수 있다.

쓰타야서점의 책 전문 코너는 크게 ‘인문·문학, 아트, 건축, 자동차, 요리’ 다섯 개로 나뉘는데, 모두 인간의 근원적인 갈망을 반영한 카테고리다. 한국 서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경영, 학습서, 자기계발서 등은 찾아볼 수 없었다. 팍팍한 현실, 돈벌이를 내려놓고 청년 시절의 꿈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성이다. 카테고리 폭은 제한되지만, 접할 수 있는 콘텐츠의 깊이는 훨씬 깊었다.

3관 2층에 마련된 음악 코너도 마찬가지였다. 수만 장에 이르는 CD, LP(레코드판)에 스피커 헤드폰 등 오디오 기기, 음악 잡지까지 한꺼번에 진열돼 있었다. 이를테면 ‘블루 자이언트(BLUE GIANT)’란 일본 만화에 등장하는 유명 재즈 넘버를 묶어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과 블루 자이언트를 커버 사진으로 쓴 재즈 잡지, 미국의 전설적인 재즈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의 LP ‘블루 트레인(Blue Train)’이 나란히 진열돼 있는 식이다.

‘우연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발견의 재미까지 더해 완전히 빠져들게 만들었다. 라디오에서 뜻밖의 좋은 음악을 들었을 때처럼 관심사를 확장시키는 효과다. 음반 진열대 옆엔 청음 시설이 마련돼 즉시 음악을 감상할 수도 있다. 결국 기자는 현장에서 컴필레이션 앨범을 샀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블루 자이언트 만화 한국어판까지 주문하고 말았다.

영화 DVD가 전문적으로 진열된 1관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스타워즈 관련 피규어, 어린이를 위한 상품 등 관심 분야에 빠져들 수 있도록 풍부한 콘텐츠를 갖췄다. 각 전문 분야에 정통한 직원이 있어 필요한 정보를 물어볼 수도 있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쓰타야는 2014년에 1109억엔(1조138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2013년 이후 일본 오프라인 서점 매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2014년 일본의 책 판매액(2조6600억엔, 한화 27조2900억원)이 정점이었던 1996년의 60% 수준으로 쪼그라든 상황에서 거둔 성과다.

일본 만화 ‘블루 자이언트(BLUE GIANT)’에 등장하는 유명 재즈 넘버를 묶어 발매한 컴필레이션 앨범과 블루 자이언트를 커버 사진으로 쓴 재즈 잡지, 미국의 전설적인 재즈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의 LP ‘블루 트레인(Blue Train)’이 나란히 진열돼 있다.

◆ 블루보틀, 커피가 예술이 되는 곳전문가들 "체험 마케팅 확산될 것"

쓰타야서점이 꿈과 여유를 제공하는 공간이라면, ‘커피 업계의 애플’로 불리는 도쿄 블루보틀은 제대로 된 커피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신주쿠역 남쪽 출구에 새롭게 문을 연 쇼핑몰 ‘뉴우먼(NEWoMan)’ 1층에 자리잡은 블루보틀 3호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블루보틀은 총 30여개 매장을 두고 있는데, 해외에는 유일하게 도쿄에만 세 개 매장을 열었다. “일본인들의 몸에 밴 친절과 직원들의 투철한 직업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고, 배울 점이 많다고 판단해 일본에 일찍 진출했다”는 게 블루보틀 창업자 제임스 프리먼의 말이다.

실제 매장 분위기를 보니 이해가 됐다. 고객들이 커피 맛 본연의 가치에 집중할 수 있게 매장 내부 인테리어를 심플하게 꾸몄고, ‘오픈 키친’ 형태로 작업 공간을 개방해 핸드드립 커피의 제조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다. 생소한 커피 용어나 커피 종류에 대해 질문하니 직원들이 친절하고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충성 고객으로 가공할 팬덤을 형성한 애플과 블루보틀이 비교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본 도쿄 신주쿠역 근처에 있는 블루보틀 3호점. 내부 인테리어를 심플하게 꾸몄고, ‘오픈 키친’ 형태로 작업 공간을 개방해 핸드드립 커피의 제조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다. 로스팅한 원두와 핸드 드립 세트 등을 판매하고 있다.

커피를 절대 급하게 제조하지 않는 것도 특징이다. 로스팅된 원두를 분쇄해 담고, 주문 순서대로 테이블에 놓인 드리퍼에 섬세하게 뜨거운 물을 붓는 과정이 하나의 쇼처럼 펼쳐진다. 훌륭한 커피 맛과 함께 정성들여 커피를 내리는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셈이다. 스페셜티 커피란 미국 스페셜티커피협회(SCAA)의 품질·맛 감정에서 80점 이상 획득한 고급 커피를 뜻한다. 연말에 휴가를 내고 도쿄를 방문했다는 김모(33·남)씨는 “매장에 한국인들이 많아서 깜짝 놀랐다”며 “제대로 된 스페셜티 커피 맛과 문화를 즐기려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오프라인 매장의 새로운 경험 중시 추세는 일본만의 현상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스타필드 하남, 롯데백화점 김포공항점 등 체험형 전문 매장, 전시장을 갖춘 오프라인 매장이 늘고 있다.

오린아 이베스트증권 연구원은 “최근 백화점들은 오프라인 유통채널의 강점을 살려 엔터테인먼트, F&B(식음료), 체험 등을 강조한 포맷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이커머스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이런 트렌드가 확산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