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당이 하루 아침에 쪼개진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를 만났다. 복도에서 잠깐 마주친 그에게 "혹시 당 안 떠나세요"라고 묻자 금방 고민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것도 아닌데 '따뜻한 보수'는 뭐고, '차가운 보수'는 뭘까요?"
여의도에 이른바 '정치 사춘기'라는 바람이 불고 있다. 대상은 보수당이라고 불렸던 새누리당에 몸을 담았던 의원들과 당직자들이다.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30명의 의원들이 새로운 보수를 외치며 당을 떠나자 이들은 갑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새누리당을 탈당한 30명의 의원들은 기존 당을 '차가운 보수' 라고 정의한다. 이에 따라 신당(新黨)은 새누리당과 다른 경제·사회 정책을 보여주겠다고 공언한다. 신당의 모습은 '따뜻한 보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대다수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차가운 보수', '따뜻한 보수'를 정확하게 구분 짓지 못한다. 새누리당 스스로 '보수'의 가치를 명확하게 정의하거나 연구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다. 새누리당을 비롯한 기존 보수 정당들은 이념과 가치를 구심점으로 모인 집합체라기 보다는 '사람'을 중심으로 결집한 모양새다. 보수의 가치 역시 깊게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지난 26일 새누리당 의원총회 비공개 회의에서 한 새누리당 의원은 "도대체 보수가 무엇이냐"라고 의원들에게 되물었다고 한다. 그는 "북한에 대한 입장, 시장 경제에 대한 입장이 보수의 기준으로 봐야 하는 것이냐"라고 질문했다. '친박(친박근혜)계와 비박(비박근혜)계로 나뉘는 것은 알겠는데, 따뜻한 보수와 차가운 보수로 나누면 나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답답함이다.
새누리당에 '보수'에 대한 정의가 없다보니 반대 급부인 신당의 '新 보수' 공약도 덩달아 흔들린다. 새누리당의 보수가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그것과 다른 '보수'를 선보인다는 것이 마음에 확 와닿진 않는다. 새누리당 '보수'가 왜 차가웠는지에 대한 신당의 진단도 명확하진 않다.
영국의 사상가 로저 스크러튼은 최근 '합리적인 보수를 찾습니다'에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정신적 유산을 잘 지켜 후대에 물려주고자 하는 신념', '자유 경제를 운영하는 주체는 책임을 질 줄 아는 자유로운 개인', '우리 뜻대로 살 수 있는 기회와 고충에 응답하고 피해를 보상하는 법의 확실성' 등을 보수로 정의했다.
유승민 개혁보수신당 의원은 보수의 가치에 대해 "헌법을 지키고 공동체를 지키며, 국가 안보를 지키는 것이 보수다"라고 밝혔다. 유 의원의 발언은 로저 스크러튼의 보수에 대한 정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30명의 의원들이 신당을 통해 펼치겠다는 '따뜻한 보수'는 생각 보다 엄청나게 새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새누리당이 추구했으나 지키지 못한 것을 실행에 옮기거나 시대에 맞춰 조금 변형시킬 뿐이다.
"새누리당 정강 정책에도 '경제 민주화'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를 좌클릭이라고 부르지 말라." 개혁보수신당 한 의원의 발언이다. 두 당은 이제라도 보수의 가치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연구했으면 좋겠다. 어느 순간 두 당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뚜렷해진다면 그만큼 한국의 보수가 성장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보수의 가치 실현이 커피 주문하듯 간단한 것은 아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