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이 ‘3D 크로스포인트’라는 신기술을 들고 30여년만에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돌아오면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 간의 치열한 암투가 시작됐다. 인텔의 메모리 시장 재등장은 세계 IT 기술 흐름에 따른 필연으로 읽힌다. 기존 D램, 낸드플래시 등 ‘올드 메모리’는 컴퓨팅 성능을 향상하는 데 명확한 기술적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반면, 인공지능(AI), 자율주행 자동차 등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이른바 뉴메모리(초고성능 메모리)에 대한 수요는 폭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뉴메모리는 PC 시대 이후 고착화된 ‘중앙처리장치(CPU)-D램-스토리지’ 구조에서 전체 컴퓨터 성능을 떨어뜨리는 메모리 병목 현상을 극복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다.

뉴메모리 시대의 최대 격전지로 부상한 곳이 바로 중국이다. 메모리 반도체가 기술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큰 변혁을 맞이하게 된 시기적 흐름과 맞물려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으로 부상 중인 중국은 뉴메모리의 헤게모니(주도권)를 결정하는 전장(戰場)이나 다름없다. 인공지능, 자율주행 등 신기술 경연장이 될 중국은 이미 인텔, IBM, ARM, 퀄컴 등 공룡 기업들이 하나둘 전초기지를 구축하고 있다.

◆왜 중국인가...2014년에만 250조원을 반도체 구매하는 데 써

중국 시장은 잠재력 측면에서 세계 IT 산업 중심지인 미국보다 월등한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4년 기준으로 중국은 한화로 250조원이 넘는 금액을 서버, PC, 스마트폰용 반도체에 쓰고 있으며, 매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승폭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의 연간 반도체 수입액이 석유 수입액보다 높을 정도다. 또 서버 교체에 보수적인 미국 IT 기업들과 달리 새로 서버를 구축해야할 기업이 훨씬 더 많다. 이미 인프라 구축이 끝난 미국과 달리 ‘신대륙’이나 마찬가지다.

미국 오레곤주에 위치한 페이스북의 데이터센터 내부 전경.

인텔의 3D 크로스포인트, 넷리스트의 스토리지클래스메모리(SCM) 등 뉴메모리가 본격적인 상용화 단계를 밟기 위해서도 중국이라는 발판 없이는 어렵다. 특히, 최근 2년간 중국 현지에서는 국내외 주요 기업들이 차세대 낸드 플래시 공장을 짓는 데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 있다. 낸드 플래시 공급이 확대돼 가격이 떨어지면 이를 기반 기술로 한 3D 크로스포인트나 SCM이 단숨에 가격 경쟁력을 얻게 된다.

① 인텔, 3D 크로스포인트는 중국에서 꽃핀다

해외 기업, 그 중에서도 중국계 기업에 대해서는 지분투자 사례가 많지 않았던 인텔은 지난 2014년에 중국 칭화유니그룹에 15억달러(한화 1조7480억원) 출자했다. 칭화유니그룹은 중국 '반도체 굴기의 선봉장'으로 불리는 국영 기업이다. 기술 제휴에 대해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한 인텔은 칭화유니그룹과 몬티지테크놀로지글로벌 등 중국계 기업에 대한 기술 이전을 약속하기도 했다.

메모리 분야에서 인텔과 콤비를 이루고 있는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역시 중국 기업과 D램, 낸드플래시 기술을 통째로 제휴하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중국 최대 반도체 업체 중 하나인 창장춘추과기(영문명 YRST)가 마이크론과 기술제휴를 놓고 협상 중이다.

이 회사의 딩웬우 부회장은 “마이크론과 낸드뿐 아니라 D램 기술까지 라이선싱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며 “논의는 내년쯤 마무리돼 기술 제휴뿐 아니라 합작, 지분투자 등 동맹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인텔 CEO가 지난해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인텔개발자포럼(IDF)에서 3D 크로스포인트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인텔과 마이크론이 중국 기업과의 적극적인 파트너십과 공동 투자를 진행하는 것은 해외 하드웨어 업체가 중국에서 사업을 확장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짐 맥그리거 티리아스 리서치의 수석 애널리스트는 “이같은 중국 기업과의 기술 제휴는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한 필수 전제조건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인텔의 중국 전략은 지난해 공개한 3D 크로스포인트 메모리 사업의 성패와도 연관이 깊다. 실제 인텔은 중국 다롄 지역에 3D 크로스포인트용 낸드플래시 생산의 전초기지가 될 공장 건설을 위해 55억달러(6조4100억원) 투자를 발표하기도 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인텔이 미국 정부의 눈치를 보면서도 중국에 낸드 공장 설립에 투자를 감행한 이유는 중국 현지에서 뉴메모리 사업 성장 가능성이 가장 큰 곳으로 판단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인텔이 중국에서 99%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는 x86 아키텍처의 CPU와 3D 크로스포인트 메모리를 하나로 묶어 대량 판매해 사업을 확대할 경우 전 세계 서버용 메모리 시장 1, 2위를 달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직격탄이 될 수 있다. 특히 중국에서 성공 사례는 일종의 뉴메모리의 레퍼런스(Reference)로 작용해 다른 나라에서도 인텔의 뉴메모리를 받아들이는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기회의 땅"...ARM-퀄컴-삼성전자 3각 편대의 반격

(왼쪽부터) ARM의 모기업인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폴 제이콥스 퀄컴 회장.

물론 인텔만 중국 시장에 공을 들이는 것은 아니다. 선공(先攻)은 인텔이 날렸지만, ARM-퀄컴-삼성전자의 3각 편대도 중국에서 반격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다.

이안 퍼거슨 ARM 글로벌 마케팅 부사장은 지난 11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내년부터는 퀄컴이 ARM의 설계를 바탕으로 기존의 저전력 기술에 특화한 칩뿐만 아니라 다양한 고성능 칩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고객사를 공정하게 대하는 것이 회사 원칙인 ARM이 특정 회사를 지목하면서 "기대해도 좋다"는 발언까지 덧붙이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ARM과 퀄컴이 차세대 사업과 관련한 전략적 파트너십이 끈끈해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퍼거슨 부사장의 말을 증명하듯 이달 퀄컴은 ARM의 설계를 바탕으로 만든 세계 최초의 10나노 기반 서버용 CPU '센트릭 2400' 시제품을 공개했다. 이 칩의 생산은 삼성전자가 맡을 것으로 보인다. ARM의 아키텍처를 바탕으로 퀄컴이 설계하고, 삼성이 생산하는 3각 동맹이 서버 부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제품은 퀄컴이 지난 1월 전략적 제휴와 조인트벤처를 설립한 중국 구이저우성 소재 IT 기업에 납품될 가능성이 높다.

ARM이 중국에서 서버 시장 점유율을 높일수록 결과적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는 득이 된다. ARM 기반의 서버용 CPU에 꼭 삼성, SK하이닉스의 메모리가 들어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한국 메모리 기업의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시나리오인 인텔의 'CPU+메모리' 사업전략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인텔의 서버시장 독점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도 ARM 진영에겐 유리한 변수다. 특히 중국은 독점에 대한 규제가 가장 강력한 시장이기도 하다. 앞서 중국 정부는 모바일 칩 시장 독점을 이유로 퀄컴에 9억7500만 달러 벌금을 부과했다.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인텔의 CPU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ARM 기반 칩의 확산을 지원할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 판세 불리해진 한국 반도체...살 길 찾은 삼성, 헤매는 SK하이닉스

시선을 한국의 반도체 기업으로 돌려보면, 전체적인 세계 메모리 시장 판도는 한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우선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낸드플래시는 중국이 가져갈 가능성이 높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오는 2020년 중국 내에서 생산하는 낸드플래시 생산량이 삼성, 인텔의 2.5배 달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한국이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는 D램은 SCM 등의 대체 기술이 등장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삼성, SK하이닉스에 밀려 경쟁력을 잃고 있는 마이크론은 중국과의 D램 기술 제휴 카드를 만지작 거리고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을 떠받치는 두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뉴메모리 시대에 대해 얼마나 준비돼 있을까?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삼성전자와 HP를 중심으로 ARM, HP, 델 등 글로벌 기업들이 결성한 차세대 메모리 표준화 연합인 Gen-Z가 발표한 스토리지클래스메모리(SCM) 시장 전망 자료. Gen-Z는 시간이 지날수록 D램이 메모리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고 SCM이 비중을 급격히 늘릴 것으로 예상했다.

① “협력 또 협력”...해외 기업과 전략적 제휴에 ‘올인’한 삼성

삼성전자는 이미 수년전부터 철저하게 대비해 왔다. 인텔 3D 크로스포인트와 유사한 SCM을 내년부터 양산하는 미국의 넷리스트와 크로스라이선스를 맺은 건 일종의 ‘생명보험’이다. ARM을 비롯해 퀄컴, AMD 등 반도체 설계 및 자산업체뿐만 아니라 HP와 같은 대형 서버업체들과의 물밑 협력도 강해지고 있다. 올 들어 국제 반도체공학 표준 협의기구인 JEDEC을 중심으로 SCM을 개발하려는 시도 역시 삼성과 HP를 중심으로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시장의 메모리 수입 규제에 대한 대비도 해놓았다. 삼성전자는 이미 중국 시안에 3D 낸드 생산 거점을 마련했다. 향후 중국 정부가 메모리 반도체 수입에 높은 관세를 부여할 가능성에 미리 대비해놓은 것이다. 삼성전자 시안 공장은 올 들어 300mm 웨이퍼 투입 기준 10만장 수준의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ARM과 대형 서버업체를 전략 파트너로 삼기 시작한 이유는 HP나 델, IBM 등이 인텔의 CPU 아키텍처 독점을 가장 경계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인텔이 아무리 좋은 CPU와 메모리를 만들어도 서버 업체에서 적용을 거부한다면 쉽게 시장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 넷리스트 크로스라이선스 제안 거절 후 소송 '역풍'

반대로 SK하이닉스는 차세대 메모리 사업 분야에서 총체적 난국을 맞고 있다. 우선 인텔의 3D 크로스포인트 대항마로 손꼽히는 넷리스트로부터 특허 침해 피소를 당했다. 지난 9월 ITC는 미국에서 유통되는 SK하이닉스의 서버용 D램 반도체가 넷리스트의 특허 6건을 침해했는지에 대한 조사를 개시했다. 조사를 끝낸 뒤 특허 침해 사실을 인정할 경우 피해액이 수천억 원대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무엇보다 뼈아픈 건 SCM 기술과 관련해 넷리스트와의 특허 소송 대신 크로스라이선스(특허공유)를 맺고 차세대 메모리를 먼저 개발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점이다.

SK하이닉스에 정통한 업계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 넷리스트는 삼성과 크로스라이선스를 체결하기 전에 SK하이닉스와 먼저 협상을 진행했지만 최종 단계에서 경영진의 거부로 결렬됐다"며 "이후 곧바로 삼성이 넷리스트에 거액의 투자금과 함께 크로스라이선스를 제안했고 차세대 메모리 개발을 포함한 협력 관계를 맺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금은 삼성과 차세대 메모리 공동 개발을 진행 중이기 때문에 하이닉스와의 협력은 필요 없다"고 말했다.

급성장하고 있는 3D 낸드 분야에서도 삼성, 도시바, 마이크론 등 경쟁사보다 경쟁력이 크게 밀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테크인사이트가 현재까지 상용화된 삼성, 도시바, 마이크론, SK하이닉스의 3D 낸드 제품을 비교 분석한 결과 집적도, 메모리 효율 등의 평가 기준에서 SK하이닉스의 제품이 최하위를 기록했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이같은 상황에서 낸드 분야에서 중국 기업의 추격은 점점 가속화 하고 있다. 특히 지난 7월 칭화유니그룹과 우한신신(XMC)의 합병으로 탄생한 창장춘추과기은 240억달러(약 28조원)를 투자해 세계 최대 낸드플래시 메모리 공장을 건설, 오는 2019년부터 양산에 돌입할 계획이다. 생산량은 2020년 월 30만장, 2030년에는 100만장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계획대로 양산이 이뤄질 경우 이 기업은 생산량 기준으로 단숨에 SK하이닉스를 넘어 삼성, 도시바를 위협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렌 젤리넥 IHS 수석 애널리스트는 “세계 메모리 시장에 더 이상의 공급업체가 필요 없는 상황에서 중국의 메모리 진출은 시장에 전체에 엄청난 이슈가 될 것”이라며 “인텔 3D 크로스포인트 역시 당장 D램, 낸드 중심 시장 구도를 바꾸진 않더라도 차세대 메모리 제품군 중 가장 상용화 가능성이 높고 시장 표준을 주도하는 인텔이 뛰어든 만큼 2~3년 뒤부터는 시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진단했다.

☞스토리지클래스메모리(SCM)
스토리지클래스메모리란 스토리지(저장도구) 역할을 할 수 있는 비휘발성 메모리 반도체를 말한다. 기존 전자기기 대부분은 중앙처리장치(CPU)가 D램를 거쳐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솔리드스테이트브라이브(SSD) 등의 스토리지로 명령을 내리는 구조다. SCM은 D램과 스토리지의 기능을 융합한 제품으로 전자기기의 반도체 인터페이스를 단순화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