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8시쯤 경남 거제시 장승포동 거리. 4층짜리 빌라가 밀집한 이 거리에 어둠이 찾아왔지만 빌라촌 불은 대부분 켜지지 않았다. 이곳은 대우조선해양 하도급 회사 직원들이 6개월~1년짜리 계약을 맺고 거주하는 원룸촌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조선소 일감이 사라지면서 직원들이 타지로 떠나자 빈집이 속출하고 있다. 현지 중개업소 관계자는 "협력업체 직원들 숙소가 몰려 있는 거제시 장승포동·능포동·마전동 일대 빌라들은 30~ 60%씩 비어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일 오후 8시 경남 거제시 장승포동의 빌라촌.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불이 환하게 켜진 뒤편 아파트와 달리 이곳 방 창문들은 깜깜하다. 인근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조선업 불황으로 빌라를 기숙사 삼아 살던 하도급 직원들이 거제시를 떠나면서 세 채 중 한 채는 비어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조선업 위기가 현실화된 2015년 말부터 거제의 실물 경기는 위축되기 시작했다. 올해 상반기 정부의 조선업 고용 대책 등이 나오며 잠시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지만 지난 9월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거제시는 정부와 정치권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 사이 본격적인 대량 실업이 닥치면서 '도시 거제'는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장승포동에서 만난 주민 장모(63)씨는 "대통령이 하야를 하든 탄핵을 당하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장 내가 먹고살기가 힘든데. 정치인도, 정부도 탄핵에만 관심이 있지 거제 사람들이 죽거나 말거나 신경이나 씁니까"라고 하소연했다.

◇탄핵으로 잊힌 도시 거제, 한국판 '디트로이트' 되나

국내 조선업 종사자의 87%가 집중해 '조선업 벨트'로 불리는 경남의 거제·통영·고성 등에선 요즘 해고와 임금 체불이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다. 올 들어 현대중공업에서 3660명, 삼성중공업에서 1795명, 대우조선해양에서 676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올해(1~10월) 거제 지역에서 실업급여를 받은 사람만 작년 같은 기간보다 3배 늘어난 3211명이다. 같은 기간 임금을 못 받은 근로자가 1만명이 넘고 금액만 498억원에 달한다. 근로자 1인당 452만원의 임금을 받지 못했다.

특정 지역의 경제가 이렇게 무너지면 뭔가 대책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민들은 아우성이다. 한 주민은 "지난 10월 정부가 '조선·해운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했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한 협력업체와 그 직원들에 대한 대책은 부실하다"면서 "형식적으로라도 찾던 장관이나 여야 정치인들도 거제를 잊은 지 오래인 것 같다"고 말했다. 거제에서 산 지 20년째라는 김모씨는 "이대로 가다간 자동차 산업이 무너지면서 지역 경제가 붕괴된 미국의 디트로이트시처럼 거제가 '한국판 디트로이트'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깃집·횟집·이불 가게까지 한숨… 서민 경제 직격탄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임금 체불이 일상화되면서 지역 경제엔 '소비 절벽'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거제 식당가에는 '연말(年末) 특수'도 사라졌다. 통상 12월 이맘때면 불야성을 이루던 '거제의 강남' 고현동 일대 먹자골목은 행인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이 지역에서 고깃집을 운영하는 유수석(53)씨는 "보통 하루 매출이 300만원은 됐는데 요즘은 50만원 채우기가 벅차다"며 "할 수 없이 8명 있던 종업원도 7명을 내보내고 1명만 남겨뒀다"고 말했다.

지난 9일 오후 6시 거제시 고현동의 한 고깃집. 작년 이맘때쯤만 해도 오후 6시면 연말 송년회를 하는 손님들로 북적였지만 이날은 금요일인데도 손님이 없어 텅 빈 상태였다. 이 식당 사장은“조선업 불황에 탄핵이니 뭐니 나라 전체가 어수선하니 식당 하는 사람들은 죽을 맛”이라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창 휴가철인 지난 8월 거제에 콜레라가 발병하면서 지역 횟집들이 치명타를 입었다. 올 하반기 고현동의 B회센터에 입점한 횟집 10곳 중 3곳이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재래시장의 상황도 비슷했다. 식당가 근처에서 이불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 업주는 "장사가 너무 안 돼서 가게를 내놓고 있는데, 팔리는 대로 문을 닫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거품 붕괴 후폭풍 우려… 산업 위기 대응 특별지역 지정 요구

불안한 부동산 시장도 문제다. 거제시에선 아파트 분양 물량이 2013~2014년 200~ 300가구에 불과했지만, 이후 조선업 호황을 믿은 대형 건설사들이 대단지 아파트 분양에 나서면서 2014년 2366가구, 2015년엔 6868가구까지 급증했다. 늘어난 물량만큼 미분양도 늘었다. 2014년 말 3가구였던 미분양은 올해 10월 현재 1681가구까지 증가했다. 최대 1억원 웃돈이 붙던 아파트 가격은 이젠 분양가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역 부동산 업계에선 "투자 목적에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산 사람도 많은데, 내년부터 아파트 입주량이 급증해 전반적인 집값이 하락하면 대출을 갚지 못해 파산하는 집이 속출할 것"이라는 말이 퍼지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거제 주민들은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되면서 한고비를 넘긴 만큼 고통받는 지역에 눈길을 돌려 달라고 호소했다.

권민호 거제시장은 "도로·항만 같은 인프라 공사도 조기 발주하고, 관광 인프라 건설 사업도 추진해야 하는데 국정 혼란으로 정책 결정 속도가 더뎌 답답하다"면서 "정부는 조속하게 거제시를 '산업 위기 대응 특별지역'으로 선정해 달라"고 말했다. 산업 위기 대응 특별지역으로 지정하면 정부가 조선업 종사자뿐 아니라 소상공인이나 지역 주민들을 위한 지원도 할 수 있다.

정부는 산업 위기 대응 특별지역 지정 근거 조항을 둔 국가균형발전특별법 개정안을 지난달 국회에 제출했지만 탄핵 정국이 길어지면서 아직 통과되지 않았고, 지금도 언제 처리될지 불투명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