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본점 지하 '살롱 드 샬롯' 매장. 20대 후반 직장인 여성 세 명이 유리 장에 진열된 가방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서로 메 보겠다고들 한다. 연말 '싱글 파티'를 앞두고 있다는 이 여성들은 가방은 물론 파티 의상까지 여러 벌 입어 봤다. '펜디' 신제품 가방에 '라 실루엣 드 유제니' 파티복, '카르티에' 시계, '에르메스' 목걸이까지 몸에 걸친 제품 가격만 700만원 상당. 하지만 지갑에서 나온 금액은 20분의 1 정도였다.
"필요할 때 언제든 명품을 손에 쥘 수 있는데 이 비싼 것들을 다 가질 필요 없잖아요? '백화점이 내 옷방이다'라고 생각한달까. 옷장에서 옷 꺼내 입듯 필요할 때 매장에 와서 빌려 입고 다시 넣어놓는 거죠." 국내외 고가(高價) 패션 브랜드들이 자태를 뽐내며 소비자들의 '간택'을 기다리고 있는 이곳은 프리미엄 렌털 서비스 매장. 수백만원 최신 가방을 2박 3일 빌리는 데 7만원 조금 넘는다. 롯데백화점 이애나 선임상품기획자(chief buyer)는 "지난 7월 본점에 문을 연 이후 하루에 많게는 50건 이상 문의가 온다"고 말했다.
고가 브랜드도 빌려 쓰는 시대다. 과거 서울 강남 일대 일부 중고 매장에서 명품을 빌려주는 일이 있긴 했지만 고가 브랜드 판매의 '최전선'이라는 백화점에서 나서서 빌려주는 건 올 들어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저성장 시대에 효율적으로 소비하는 '미니멀라이프'와 '체험 경제'를 추구하는 소비자들이 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이정민 트렌드랩 506 대표는 "상대적으로 결핍을 덜 경험한 요즘 세대에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줄지 않는데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짐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줄이고 버리는 일'이 미덕이 되고 있다"며 "과거엔 '명품 계(契)'까지 있었지만 요즘엔 꼭 '내 것'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내 것처럼' 쓸 수 있다는 유목민적 소유 방식이 소비 트렌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내가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해봤느냐'가 중요한 시대에 경험의 폭을 넓히는 게 렌털 산업 성장의 바탕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여 서비스가 고가 브랜드 구매를 활성화하는 '입구' 역할을 한다는 의견도 있다. 패션 큐레이터 김홍기씨는 "과거 비슷한 서비스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업체 측에서 '가치를 깎는다'며 꺼렸지만 최근 들어서는 '써봐야 좋은 걸 안다'는 의견이 늘면서 '미래 소비자'를 모으기 위한 유인책"이라고 설명했다. 고가 브랜드 렌털 시장은 미국과 일본 등지에선 활성화된 분야. 2009년 파티복 대여로 시작한 미국 스타트업인 '렌트더런웨이'는 현재 매출 9000억원을 넘기고 있다. 지난해 문을 연 일본 기업 '락서스'는 1년 만에 10만명 이상이 다운로드하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국내 온라인 업체도 최근 고가 브랜드 렌털 서비스에 뛰어들고 있다. SK플래닛이 지난 9월 말 선보인 '프로젝트 앤'은 '손안의 옷장'이란 개념으로 정액권 구매 비용에 따라 옷과 가방을 빌려주는 시스템이다. 한 달여 만에 여성 3만명 이상이 가입했고 이용권 판매는 연말까지 목표로 잡았던 4000여명을 이미 돌파했다. 100여개 브랜드 1만 2000여점의 상품이 등록돼 있다. 최근에는 몽클레르, 노비스 같은 고가 패딩 브랜드도 들어와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트렌드 코리아 2017'의 저자 김난도 교수는 이를 '바이바이 센세이션(Bye-Buy sensation)'이라고 표현했다. 김교수는 책에서 "소유보다는 공유에 익숙한 세대가 보여주는 소비를 위한 합리화의 모습"이라며 "버리고 나니 사고 싶고, 새로운 것을 사고 싶어 버리는 진화된 구매 욕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