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은 헤리티지재단처럼 재단으로 운영하고 각 기업 간 친목 단체로 남아야 한다.” (구본무 LG그룹 회장, 6일 국회 최순실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정경유착 고리로 지목된 전경련의 개혁 모델로 미국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이하 헤리티지)이 거론되고 있다.

헤리티지는 1973년 에드윈 풀너 박사가 창설한 연구기관이다. 출범 초기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1980년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 싱크탱크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헤리티지는 레이건 당선인에게 1000여쪽에 달하는 ‘리더십을 위한 위임령’을 제안했다. 여기에는 3000여건의 개혁안이 담겼는데, 레이건 정부는 이 중 60% 정도를 정책으로 채택해 추진했다.

2012년부터 3년간 헤리티지에서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근무한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달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헤리티지가 준비한 방대한 정책 어젠다로 레이건은 취임과 동시에 빠르게 움직이며 '가장 준비된' 대통령이란 평을 들었다”고 말했다.

전경련이 헤리티지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는 얘기는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전경련은 2011년에도 ‘헤리티지와 같은 싱크탱크로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권의 개편 요구에 헤리티지 모델을 연구하겠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 “헤리티지처럼 투명해야”... 예산 모금·집행 내용 공개할까

헤리티지와 전경련은 재정 운용의 투명성에서 명확히 갈린다. 헤리티지는 매년 후원금액과 사용 내용을 담은 연례 보고서(Annual Report)를 발표한다. 후원 금액에 따른 등급과 후원자 이름(법인·개인)이 후원자 명단에 기재된다. 예를 들어 한화그룹은 10만달러(한화 1억2000만원) 이상을 후원한 ‘파운더’(Founder) 그룹에 이름을 올렸다.

2015 헤리티지재단 후원자 명단. 한화그룹(빨간줄)은 10만달러 이상을 기부한 ‘파운더’(Founders) 그룹에 이름을 올렸다.

개인 후원은 1년 25달러(한화 3만원)부터 가능하다. 최중경 전 장관은 “싱크탱크는 풀뿌리에서 펀딩이 돼야 한다”며 “헤리티지는 70만명이 평균 100달러를 낸 기금으로 운영된다. 우리나라도 10만명이 연 5만원씩 내면 헤리티지 같은 싱크탱크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전경련은 매년 기업들이 내는 회비를 공개하지 않는다. 매년 연례보고서를 발간하지만 예산과 관련한 내용은 없다. 6일 국회에서 진행된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도 전경련의 연간 운영 예산은 400억원 정도이며 삼성을 포함한 5대 그룹이 내는 회비가 200억원 가량이라고 대략적인 수치만 공개됐을 뿐이다.

예산 사용처도 구분된다. 헤리티지는 2015년 전체 예산의 75%를 연구 프로그램에, 22%를 기금 모금 행사에 사용했다. 재단 관리·운영엔 불과 3%만 지출했다.

그러나 전경련은 예산 대부분을 관리·운영비로 지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재계에선 “전경련이 회원사보다는 사무국 운영에만 더 관심을 쏟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재단 후원이 아닌 ‘연구 프로그램 스폰서십’도 헤리티지 재단의 투명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꼽힌다. 헤리티지는 후원자의 이름을 붙인 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용역 형태로 특정 연구를 의뢰하는 경우도 있지만 공공재적 성격을 띤 연구 후원이 더 많은 것으로 전해졌다.

◆ 이데올로기에 매이지 않는 공정성과 독립성

헤리티지는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연구기관이지만 연구 과정과 결과에 대해선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한쪽으로 편향돼 공정성을 잃게 되면 재단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경련이 발표한 자료는 재벌 대기업의 입장을 대변해 공정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중소기업의 일감을 빼앗고 후계자 편법 상속 방식으로 꼽히는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에 대해 “계열사 간 거래는 효율성, 보안성, 긴급성 등의 장점이 있어 대·중견·중소기업, 공기업, 해외 주요기업들도 모두 하는 일상적인 경영활동”이라고 평가한 ‘계열사 간 거래, 왜 할까요’ 보고서가 대표적이다.

전경련이 발간한 정책보고서. 전경련이 발간한 정책 보고서는 반론을 배제하고 대기업의 입장만을 담아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여권에서도 전경련 자료의 편향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여권 관계자는 “전경련의 자료를 보면 반론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며 “어떤 정책이든 일장일단이 있는 건데 오로지 자신들의 입장만 담고 있으니 근거자료로 사용하기가 모호하다”고 말했다.

아산정책연구원의 제임스 김 연구위원은 “싱크탱크의 경쟁력은 공정성에 달려 있다. 지향 이념 때문에 불공정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 신뢰도가 추락한다”며 “신뢰도가 무너진 싱크탱크는 다른 기관과의 경쟁에서도 밀리고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고 말했다.

특정 집단의 입장만 대변하려다 보면 맹점이 생기고 연구 결과에 대한 신뢰도도 함께 떨어진다는 게 김 연구위원의 설명이다. 김 연구위원은 “중도적인 연구기관은 진보·보수 연구위원을 적절히 배치해 공정성을 확보하고 있다”며 “비교적 진보적인 싱크탱크로 알려진 ‘브루킹스 연구소’의 로버트 케이건은 완전 보수적인 연구원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념적 편향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선 재단의 독립성도 확보돼야 한다. 재단 설립에 출연한 기업들의 입김에서 벗어나야 공정한 연구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기업들이 용역을 의뢰한 프로그램에 대해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지만, 결과까지 ‘감 놔라 배 놔라’해선 안된다는 지적이다.

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 중간에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증인으로 나선 대기업 회장들에게 “전경련 해체에 반대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구본무 LG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신동빈 롯데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앞줄 왼쪽부터 손든 사람만), 허창수(뒷줄 손든 사람) 전경련 회장이 손을 들었다. 이 중 구 회장과 정 회장은 이후 진행된 청문회에서 전경련을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 축소는 불가피... 해체냐 개혁이냐 갈림길에 선 전경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재계 총수들은 6일 청문회에서 전경련 탈퇴를 공식 선언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이 “삼성이 전경련에 기부금을 내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하라”고 요구하자 “그러겠다”고 답했다. 이 부회장은 “개인적으로는 전경련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한 뒤, “그냥 저희는 탈퇴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은 전경련 회원사 중 가장 많은 회비를 내는 기업이다. 현대자동차와 SK, LG 등 4대 재벌 역시 전경련 탈퇴 의사를 밝혔다. 전경련 운영비의 절반가량을 부담하는 4대 그룹이 탈퇴를 선언하면서 전경련의 예산은 급격히 줄어들 전망이다. 조직·인력 축소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전경련은 7일 이승철 부회장 주재로 긴급회의를 열어 삼성과 SK, LG 등의 탈퇴 문제와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전경련 고위 관계자는 “어제 청문회에서 나온 국회의원들의 지적과 그룹 총수들의 의견을 엄중하게 받아들인다”며 “향후 사회 각계 각층과 회원사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기로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