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직원들은 전 세계 첨단 기술 트렌드에 관한 의견을 이메일로 활발히 공유한다. 그중에서도 중국 테크업계의 부상은 빠지지 않는 초미의 관심사다. 미국 IT 기업이 메신저 서비스를 내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중국의 위챗은 이미 가입자 10억명의 전 국민 플랫폼을 만들어 냈다. 미국의 메신저가 메시징 기능을 넘어 플랫폼화를 고민하고 있을 때도 중국에선 위챗을 통한 주문·결제·차량호출이 가능했다. 과거 미국에서 일어난 현상이 몇년의 시차를 두고 중국에서 재현되었다면, 이제 중국에서 일어난 현상이 오히려 미국에 귀감이 되고 있다. 어제의 중국이 ‘뒤처진 과거’였다면, 오늘의 중국은 ‘다가올 미래’다. 시차가 바뀐 것이다.

미국의 유명 IT 매체 테크크런치가 베이징에서 주최하는 행사 ‘테크크런치 베이징 2016’에 다녀왔다. 매년 실리콘밸리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첨단 기술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는 다른 도시에서도 열리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이례적으로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두 차례 열리고 있다. 중국 테크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인들과 투자자들이 한데 모이는 이 행사를 통해 중국 테크 산업의 급성장을 체감할 수 있었다. 중국은 미국과는 또 다른 방법으로 이미 세계를 선도하며 미래를 건설하고 있다. 중국 첨단기술 업계의 리더들은 시장규모보다 다가올 흐름을, 수익모델보다는 기술혁신을, 경쟁보다는 파이키우기를 자주 이야기했다. 실리콘밸리의 리더와 다를 바 없었다.

존 러셀(맨 오른쪽) 테크크런치 기자가 11월 7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테크크런치 행사에서 벤처 투자 전문가들과 동남아시아 투자에 관한 세션을 진행하고 있다.

◆"AI가 금융·의료·교통 주도할 것" 가장 놀라운 건 미래기술에 대한 관심이었다. 아직 사업보다는 담론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인공지능(AI)과 가상현실, 로봇과 바이오테크는 이미 중국에선 가장 많은 스타트업이 배출되는 분야가 됐다. 적지 않은 회사들이 기술개발 단계를 넘어 사업화에 성공했고 일부는 상장사로 거듭났다. 특히 인공지능은 미래 경제를 주도할 기술로, 막대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었다. 전 구글차이나 사장이자 중국 VC 업계의 거두인 리카이푸는 이번 행사에 참석해 "지난 1년간 투자한 기업 중 50% 이상이 AI 관련 기업"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AI가 금융과 의료, 교통 분야에서 눈부신 혁신을 이뤄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모두가 미래 기술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하고, 수많은 인재가 도전하고, 막대한 자본이 투자되고 있었다.

놀라운 동시에 두려웠다. 아직 한국에서 AI 분야에서 사업화에 성공했다는 기업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테크업계는 배달과 숙박, 부동산 등 낙후산업의 서비스 효율화가 주된 관심사다. 이들 산업에서의 서비스 혁신 역시 물론 중요한 일이겠지만, 미래 기술에 대한 낮은 관심과 투자로 더 큰 기회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닐지 되새겨볼 일이다.

미래 기술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새로운 기술이 확산되는 속도 역시 경이로웠다. 차세대 공유경제 리더로 행사에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자전거 공유 서비스 ‘모바이크’는 불과 1년 만에 전국 단위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택시호출앱인 디디다처가 전국 서비스에 3년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훨씬 더 단축된 것이다. 기술이 서비스로 탄생하고 시장에 침투하는 속도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아울러 모델이 검증되면 빠르게 확장할 수 있는 중국의 성장기반을 보여준다.

혁신산업의 발전은 우수한 기술만으로 달성하기 어렵다. 과감한 자본 투자와 혁신을 뒷받침하는 제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소비자 등 복합적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이 점에서 중국은 한국과 여러 면에서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선 혁신적인 서비스가 탄생하면 규제와 충돌하거나 기성 사업자와 충돌해 쉽게 좌초된다. 서울 택시의 승차거부 문제를 해결하려 나타난 교통 스타트업 콜버스가 규제와 견제에 시달리는 동안, 모바이크는 텐센트와 세콰이어 캐피털 등 유수의 투자자로부터 시리즈C 펀딩을 마치고 동남아 확장마저 꾀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두 회사가 작년 거의 비슷한 시기에 창업했다는 것이다.

‘중국 스타트업의 대부’ 리카이푸 전 구글차이나 사장이 자신이 설립한 창업 지원 센터인 창신공장(創新工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3억 인구가 거대한 '빅데이터' 중국의 속도만큼이나 주목할 만한 것은 규모다. 10억명 이상의 인구는 거대한 소비시장만을 뜻하지 않는다. 미래 기술발전은 분야를 막론하고 대량의 데이터가 필요한데, 중국의 인구수는 그 자체로 빅데이터다. 바이오테크 세션에서 연사로 나선 유전자데이터분석 기업 일루미나 차이나의 CEO는 중국 내 한 의료기관에서 다루는 암환자수가 작은 나라의 전체 인구수보다 많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것은 정밀의학 발전에 필수적인 대량의 의료데이터를 의미하며, 미래 의료기술 시장에서 중국이 선두일 수밖에 없는 근거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인공지능 개발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 센스타임의 공동창업자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올해 이미지넷(이미지 인식 분야의 올림픽)에서 자사의 안면인식 기술이 구글과 페이스북을 압도했음을 밝히며, 이미지 인식 분야를 선도할 수 있는 이유로 중국 내 압도적인 안면 데이터 확보력을 지목했다. 미래 기술은 대량의 데이터를 축적하고, 축적된 데이터에 숨겨진 패턴을 이해하고, 패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동화와 최적화의 가치를 발견해내는 것이 큰 흐름이다. 여기서 패턴을 발견하는 기술력만큼이나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 기반, 즉 규모 있는 데이터의 중요도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이 처한 인구감소 위기는 경제둔화뿐만 아니라 기술개발 차원에서도 부정적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

또 한가지 놀라웠던 것은 중국 기업가들의 패기였다. 전시 부스에서 만난 중국 스타트업 기업가들은 모두 세상을 주도한다는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기업가들에게서 자주 들었던 말은 “우리가 이미 미국의 기술력을 앞질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러한지는 지켜볼 문제겠으나, 전 세계 IT패권을 주도하는 실리콘밸리와의 전선을 ‘기술력’으로 긋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했다. 중국 정부는 2030년까지 산업 전 분야를 혁신기술을 통해 개선하는 그랜드 플랜 아래 신생 기술기업을 적극 육성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중국의 스타트업은 서비스 기업을 넘어 국가혁신의 파트너로도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이 풀어야 할 문제를 스타트업이 풀게 하고, 채워야 할 빈칸을 스타트업의 아이디어로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는 혁신이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큰 비전을 이야기할 용기와 상상력이다. 언제서부턴가 우리는 위기대응의 방법론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내일을 주도할 비전에 대해서는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수세적 분위기가 수세적 제도와 수세적 환경, 수세적 태도로 이어져, 한국의 기업 역시 혁신을 잉태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른 것 같다. 미래에 대한 보다 대담하고 공격적인 자세가 요구되는 때다.